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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이문열 장편소설 '시인'(민음사)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0. 12. 13.



이 소설은 조선 후기 시인 김병연(김삿갓)의 생을 가상의 평전 형태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이문열 작가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힌다.
부끄럽게도 이 소설을 여태 읽지 못해 이제야 겨우 펼쳤다.

내 감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름다운 소설'이다.
작가는 역적의 자손으로 숨어 살던 김병연이 다시 신분 상승을 꿈꾸며 호방하게 시를 쓰던 청년기, 신분상승이 좌절된 뒤 세간에 잘 알려진 민중 시인으로 유랑하던 장년기, 더 시를 쓰지 않아도 삶 자체가 시가 된 노년기를 유려한 문장으로 펼쳐낸다.
특히 소설 마지막 부분의 노년기를 묘사한 문장은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아련했다.
이문열 작가의 문장이 훌륭하다는 걸 모르진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금 그 맛을 느꼈다.
한동안 요즘 한국 작가들의 소설만 집중해 읽다가 오랜만에 이문열 작가의 소설을 읽으니 그런 부분이 더 돋보인다.
이문열 작가만큼 눈에 잘 들어오고 읽을 때 맛깔나는 문장을 쓰는 작가가 극히 드묾을 말이다.
간만에 문장의 맛에 집중할 수 있어 좋은 소설이었다.

김병연의 생에 관한 작가만의 해석도 매력적이다.
작가는 큰 틀에선 역사와 민담을 바탕으로 김병연의 생애를 따라가지만, 그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는 김병연이 방랑하며 세상을 떠돌게 된 계기에 관한 다른 해석이다.
세간에는 김병연이 조부 김익순의 정체를 모른 채 백일장에서 조부를 탄핵하는 글로 장원을 받았다가 나중에 충격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작가는 김병연이 조부의 정체를 알고도 조부를 탄핵하는 글을 썼다는 해석을 설득력 있게 내놓는다. 
그리고 이 해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적의 자손이 돼 나라를 향한 충(忠)과 부모를 향한 효(孝) 사이에서 방황하는 김병연의 생애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소설 곳곳에서 김병연의 삶과 겹쳐 보이는 작가의 삶(워낙 유명하니 설명을 생략한다)은 소설에 현재성을 부여한다.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생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썼을 때 나이가 불과 43세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지금의 나보다 고작 3살 많았던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니.
문득 며칠 전 새로 출간한 장편소설과 다음 달에 출간할 새 장편소설을 숨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