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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배명훈 에세이 'SF 작가입니다'(문학과지성사)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0. 12. 27.

 

"일확천금을 꿈꾸며 성실하게!"
이 에세이에서 내가 건진 문장이다.
최근 들어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는데(신간도 낸 드라마 원작 소설가가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문장 덕분에 많은 용기를 얻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작가라는 인종은 보기 드물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소설가는 더 드문 인종이다.
'SF 작가입니다'는 SF 작가라는 범주를 넘어 소설가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엿볼 수 있는 솔직한 에세이다.
장강명 작가가 최근에 내놓은 '책 한번 써봅시다'(한겨레출판사)와 '책, 이게 뭐라고'(아르떼)도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 잘 보여주는 에세이였는데, 'SF 작가입니다'는 그보다 더 깊이 작가라는 사람에 집중하는 에세이였다.


읽는 내내 "이 사람, 정말 똑똑한 사람이구나"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작가는 위트 있는 문장, 다방면에 걸친 넓은 지식, SF 작가로서 겪는 고충과 분투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품위와 자의식을 잃지 않는다.
일반 독자보다 작가가 훨씬 더 즐겁게 공감할 수 있는 에세이가 아닌가 싶다.

작가의 문장에 기대어 내 위치가 어디쯤 놓여있는지 많은 생각을 해봤다.
빈약한 SF 시장을 개척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온 작가와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나 또한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지금까지도 받는 가장 큰 오해는 장르 소설 작가라는 오해다.
이는 내 데뷔 경로가 "한국의 해리 포터를 찾는다"던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데뷔작인 장편소설 '도화촌기행'을 단 한 번도 판타지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니 전기소설(傳奇小說)로 볼 여지는 있겠지만, 나는 '도화촌기행'을 극사실주의 소설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왜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에 응모했느냐고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도화촌기행' 원고로 몇 년간 수많은 장편 공모에 들이대고 투고도 했는데, 내게 문을 열어준 게 공교롭게도 그중 하나였던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이었을 뿐이다.
당선 소식을 들으면서도 "왜 나를?"이라는 의문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실제로 '도화촌기행'은 출간 후 장르 소설 독자들에게 "이게 무슨 판타지"냐고 꽤 많은 욕을 먹었다.
마흔을 앞둔 고시생이 주인공인 소설이 '한국의 해리포터'가 될 수는 없지 않나.

큰 상금도 받고 단행본도 바로 출간했지만, 앞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게 새 작품을 써달라는 청탁은 오지 않았다.
우연히 한 신인상 수상식에 참석해 문인들과 함께할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내 데뷔 경로를 듣더니 선을 긋는 모습을 본 일이 있다.
심지어 나는 정식으로 등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말도 들었었다.
단행본을 낸 일은 없지만 신춘문예나 문예지에서 단편소설로 당선된 사람은 작가이고, 장편 공모에 당선돼 큰 상금을 받고 단행본까지 낸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니.
아무튼 이 바닥이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랬다.
지난해 '침묵주의보'로 백호임제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한 심사위원이 "장르 소설 작가에게는 상을 줄 수 없다"며 끝까지 수상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건너 들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사례가 있는데, 더 말하면 길어질 듯해 멈춘다.

 


오해를 불식시키는 방법은 하나, 부지런히 새 작품을 내는 일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최소 세 작품 이상을 가진 작가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세 작품 이상 단행본을 낸 작가를 작가가 아니라고 취급하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문제는 아무리 새 장편을 열심히 써도, 출간할 곳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는 점이다.
등단했다고도, 등단하지 않았다고도 부르기 어려운 애매한 '듣보잡' 작가의 원고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출판사는 거의 없었다.
얼마 전 '젠가'를 출간한 뒤, 비로소 나는 단행본 세 권을 가진 작가가 됐다.
거의 10년이 걸렸으니, 오래도 걸렸다.
보름 후에는 네 번째 단행본이 나온다.
이젠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명함을 파도 쪽팔리진 않을 것 같다.

그 단계를 넘어서니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소설로 먹고살 수 있느냐 없느냐!
최근 JTBC 금토드라마 '허쉬' 방영이 시작된 이후 나름대로 기대를 많이 했다.
나도 드라마로 만들어진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처럼 장기 베스트셀러에 올라 돈 좀 버는 것 아니냐는 기대 말이다.
시작은 좋았다.
원작 '침묵주의보'는 출간 3년 만에 처음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순위도 매일 상승했다.
유명 작가들 작품 사이에 내 작품이 끼어있으니 없던 뽕이 다시 차오르려고 했다.

기쁨은 잠시뿐, 하락 속도 또한 무서웠다.
'침묵주의보'는 지난 1주 사이에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권에서 바로 빠졌다.
반면, 함께 상위권에 있던 다른 소설들은 모두 순위에서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신작 '젠가'는 전작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극적인 판매량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작품에 관한 평가는 전작과 신작 모두 좋은 편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내 브랜드가 듣보잡이어서 생긴 문제로구나."
많이 우울해졌다.

'SF 작가입니다'는 성실하게 사는 일이 가계와 심리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저술업이란늘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는 게임이고, 대부분의 참여자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직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147페이지)고 말이다.
"특히 친한 동료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되도록 짧게 절망한 다음 묻어갈 방법을 재빨리 모색하자. 옹색하게 들리겠지만, 먼 길을 함께 가는 사이란 그런 것이다. 그가 낸 길을 수월하게 따라간 다음, 내가 앞서는 날이 오면 그를 위해 길을 내는 것"(148페이지)이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전한다.

나는 이른바 문단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딱히 문우도 없으니, 내 앞길을 열어줄 존재는 내가 앞으로 낼 작품 뿐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돌이켜 보면 첫 장편소설 '발렌타인데이'에 보내준 은사님의 응원 때문에 두 번째 장편소설 '도화촌기행'을 써서 데뷔할 수 있었고, '침묵주의보'는 '도화촌기행'을 내줬던 출판사 덕분에 가까스로 세상에 출간할 수 있었다.
'침묵주의보'의 드라마 판권이 팔리는 덕에 '젠가'를 수월하게 출간할 수 있었고, 이 모든 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20년 가까이 묵혀뒀던 첫 장편소설도 다음 달에 '다시, 밸런타인데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성실하게' 다음 작품을 쓰다 보면 내게도 진짜 일확천금의 기회가 오지 않을까.
'SF작가입니다'는 내게 많은 용기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