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디 여린 5월의 초록
2012-05-10 11:50
자동차로 오갈수 없는 산간 오지 화천 비수구미 마을 가는 길…6~7㎞ 오색 들꽃 펼쳐진 그 길을 터벅터벅 걷다
비포장 숲길 따라 괴불주머니·제비꽃·돌단풍이 정겹게 맞이하고
5월의 산과 발치의 소소한 풍경…도시생활 피로 잊게하는 2시간여 트래킹
‘내륙의 섬’마을에선 장씨네·김씨네·심씨네 3가족 느린 삶과 마주하는데…
5월의 산은 지나갈 계절과 다가올 계절이 포개져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침엽수 잎의 빛깔은 지난 계절을 견뎌낸 강건함으로 짙푸르고 무겁다. 활엽수 잎의 빛깔은 이제 막 돋아난 안쓰러움으로 여리고 가볍다. 5월의 산에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초록 빛깔들이 산비탈에서 층위를 이룬다. 들뜬 신생의 빛과 후미진 오래된 빛이 반목하지 않는 5월의 산은 다가올 여름의 산보다 다채롭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은 저마다 채보(採譜)할 수 없는 셈여림 기호의 연속이다. 사람들의 지친 눈은 초록 속에서 아늑해진다. 흩날리는 벚꽃잎은 없지만 수만 가지 초록으로 물결치는 5월의 산과 발치의 소소한 풍경들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강원도 화천군 동촌2리엔 아직도 자동차로 오갈 수 없는 산간 오지마을이 있다. 평화의 댐 하류 오른쪽으로 굽어보이는 산등성이를 돌아가면 비수구미(飛水口尾) 계곡이 나오는데, 계곡 하단부 파로호(破虜湖) 최상류에 계곡의 이름을 딴 마을이 깃들어 있다. 마을에 닿는 방법은 해산터널 앞 쉼터에서 비포장 숲길을 따라 두 시간 동안 걸어 내려오거나 북한강 수하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는 것뿐이다. 강원도까지 오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마을로 향하는 길목을 배로 주마간산(走馬看山)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고스란히 풍경을 눈으로 주워 담는 것은 결국 두 발로 느리게 길을 저어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비포장 숲길을 따라 소박한 봄이 흐른다= 마을로 향하는 숲길의 들머리는 해산터널 앞 해산령 쉼터다. 해산터널은 1986m의 길이로 해발 651m 지점에 뚫려있다. 터널엔 대한민국 최북단, 최고봉, 최장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따라다니는데, 실은 대관령 터널의 고도가 더 높고, 돌산령 터널이 더 북쪽에 가까우며, 이보다 더 긴 터널도 꽤 된다. 무관의 신세지만 이 같은 전관예우가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키진 않는다. 최북단, 최고봉, 최장이라고 우기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편안하다. 마을까지 이어지는 숲길의 길이도 6㎞라고 하지만 실은 6.7㎞이다. 6㎞보다는 7㎞에 가깝다. 시시콜콜 따지고 들어가면 피곤해지는 것이 여행이다.
길은 목적지인 비수구미 마을까지 완경사로 미끄러지며 파행한다. 걸어서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량 소요되는 여정이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진땀을 빼는 길은 아니지만, 노면이 고르지 못해 빠르게 걷긴 어렵다. 자갈의 질감이 신발 밑창을 사이에 두고 저릿하게 느껴질 때마다 왜 이 길이 자동차로 드나들기 어려운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봄은 한순간 휘몰아치다 사라져 버리는 벚꽃으로 대표되는 도심의 봄처럼 허무하지 않다. 산벚은 도심의 벚처럼 규모로 주변을 압도하지 않는다. 꽃을 피우되 다른 꽃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한 철을 난다. 햇살 내려앉는 길가엔 제비꽃, 냉이꽃, 꽃다지, 각시붓꽃, 봄맞이꽃, 꽃마리, 갈퀴나물, 뱀딸기, 줄딸기, 고들빼기, 씀바귀, 애기똥풀 등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들꽃들이 자글거린다. 도심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노란 괴불주머니가 길가 곳곳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이채롭다. 물가 바위 위엔 이끼와 더불어 돌단풍 흰꽃들이 곱게 돋아있다. 숲길에서 봄은 자세히 봐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
▶ ‘내륙의 섬’ 비수구미 마을= 숲길을 걷는 내내 물 흐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해산 자락에서 발원한 물은 산의 가장 순한 부분을 파고들어 파로호까지 제 갈 길을 내는데, 이 길은 사람에게도 순하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물길을 따라가야 산다는 말은 옛 사람들의 오랜 경험에 근거한 상식이다.
전국 직선도로에서 하루에 교통사고, 로드킬 등으로 죽어나가는 생명들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라. 번호도 없이 물길을 따라 굽이도는 거친 길이 실은 사람에게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다. 한국전쟁 이후 부쳐 먹을 땅이 없던 사람들과 실향민들은 이 길을 따라 물처럼 깊숙이 흘러들어와 화전과 마을을 일궜다.
‘내륙의 섬’ 비수구미 마을은 대한민국에 몇 남지 않은 오지마을 중 하나다. 한때 100여 가구 이상이 부대끼며 살았다는데 70년대 화전민 정리로 많은 주민들이 바깥으로 흩어졌다. 지금 마을엔 장 씨네, 김 씨네, 심 씨네 3가구가 전부다. 3가구 모두 민박과 식당을 겸하며 밭농사 등으로 소일하는 느린 삶을 살고 있다. 바깥으로 드나드는데 애로가 있을 뿐, 겨울에 춥지 않고 날 풀리면 기웃거리는 이들이 많아 사계절 자족하며 살 만하단다.
걷다가 허기진 속은 산채정식으로 채운다. 고사리, 씀바귀, 고들빼기, 취나물 등 각종 산나물이 한상 가득 오른다. 말리거나 데쳐서 풋기를 뺐지만 산나물은 산에서 온 것다운 흙의 향기로 풍요롭다. 아리지 않은 쌉싸름한 맛에 간간함이 곁들여져 그 맛이 일품이다. 개두릅은 장아찌로 만들어 쓴맛을 덜고 짭조름하고 새콤한 맛을 더했다. 제철인 곰취도 장아찌로 모습을 바꿔 밥 대신 막걸리를 부른다.
살짝 오른 취기에 걸어서 되돌아갈 오르막이 난감하다면 물길을 타면 된다. 3가구 모두 마을과 수하리를 오가는 보트를 직접 운행하고 있다. 마을에서 수하리 선착장까지 배로 5분이면 닿는다. 보트 후미에 이는 흰 물보라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 가는 간이선착장의 모습이 시원섭섭하다.
▶비수구미 마을에선 = 3가구 모두 숙박 가능. 1박 3만원, 산채정식 1인당 1만원. 장윤일 씨네 (033)442-0145, 심금산 씨네 (033)442-3952, 김상준 씨네 (033)442-0962.
정진영 기자/123@heraldm.com
5월의 산과 발치의 소소한 풍경…도시생활 피로 잊게하는 2시간여 트래킹
‘내륙의 섬’마을에선 장씨네·김씨네·심씨네 3가족 느린 삶과 마주하는데…
5월의 산은 지나갈 계절과 다가올 계절이 포개져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침엽수 잎의 빛깔은 지난 계절을 견뎌낸 강건함으로 짙푸르고 무겁다. 활엽수 잎의 빛깔은 이제 막 돋아난 안쓰러움으로 여리고 가볍다. 5월의 산에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초록 빛깔들이 산비탈에서 층위를 이룬다. 들뜬 신생의 빛과 후미진 오래된 빛이 반목하지 않는 5월의 산은 다가올 여름의 산보다 다채롭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은 저마다 채보(採譜)할 수 없는 셈여림 기호의 연속이다. 사람들의 지친 눈은 초록 속에서 아늑해진다. 흩날리는 벚꽃잎은 없지만 수만 가지 초록으로 물결치는 5월의 산과 발치의 소소한 풍경들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강원도 화천군 동촌2리엔 아직도 자동차로 오갈 수 없는 산간 오지마을이 있다. 평화의 댐 하류 오른쪽으로 굽어보이는 산등성이를 돌아가면 비수구미(飛水口尾) 계곡이 나오는데, 계곡 하단부 파로호(破虜湖) 최상류에 계곡의 이름을 딴 마을이 깃들어 있다. 마을에 닿는 방법은 해산터널 앞 쉼터에서 비포장 숲길을 따라 두 시간 동안 걸어 내려오거나 북한강 수하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는 것뿐이다. 강원도까지 오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마을로 향하는 길목을 배로 주마간산(走馬看山)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고스란히 풍경을 눈으로 주워 담는 것은 결국 두 발로 느리게 길을 저어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걸음보다 정직한 작용 반작용은 없다. 한 걸음 몸을 옮기려면 몸무게만큼의 힘을 두다리에 가해야 하는데, 몸에서 짐을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걸음은 편안해진다. 먼 발치로 보이는 풍경은 걸음이 편안해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작은 선물이다. 걷는다는 것은 결국 겸손을 배우는 과정일 터이다. 정진영 기자/123@heraldm.com |
▶비포장 숲길을 따라 소박한 봄이 흐른다= 마을로 향하는 숲길의 들머리는 해산터널 앞 해산령 쉼터다. 해산터널은 1986m의 길이로 해발 651m 지점에 뚫려있다. 터널엔 대한민국 최북단, 최고봉, 최장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따라다니는데, 실은 대관령 터널의 고도가 더 높고, 돌산령 터널이 더 북쪽에 가까우며, 이보다 더 긴 터널도 꽤 된다. 무관의 신세지만 이 같은 전관예우가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키진 않는다. 최북단, 최고봉, 최장이라고 우기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편안하다. 마을까지 이어지는 숲길의 길이도 6㎞라고 하지만 실은 6.7㎞이다. 6㎞보다는 7㎞에 가깝다. 시시콜콜 따지고 들어가면 피곤해지는 것이 여행이다.
길은 목적지인 비수구미 마을까지 완경사로 미끄러지며 파행한다. 걸어서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량 소요되는 여정이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진땀을 빼는 길은 아니지만, 노면이 고르지 못해 빠르게 걷긴 어렵다. 자갈의 질감이 신발 밑창을 사이에 두고 저릿하게 느껴질 때마다 왜 이 길이 자동차로 드나들기 어려운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봄은 한순간 휘몰아치다 사라져 버리는 벚꽃으로 대표되는 도심의 봄처럼 허무하지 않다. 산벚은 도심의 벚처럼 규모로 주변을 압도하지 않는다. 꽃을 피우되 다른 꽃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한 철을 난다. 햇살 내려앉는 길가엔 제비꽃, 냉이꽃, 꽃다지, 각시붓꽃, 봄맞이꽃, 꽃마리, 갈퀴나물, 뱀딸기, 줄딸기, 고들빼기, 씀바귀, 애기똥풀 등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들꽃들이 자글거린다. 도심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노란 괴불주머니가 길가 곳곳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이채롭다. 물가 바위 위엔 이끼와 더불어 돌단풍 흰꽃들이 곱게 돋아있다. 숲길에서 봄은 자세히 봐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
돌단풍, 괴불주머니, 병꽃나무 |
▶ ‘내륙의 섬’ 비수구미 마을= 숲길을 걷는 내내 물 흐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해산 자락에서 발원한 물은 산의 가장 순한 부분을 파고들어 파로호까지 제 갈 길을 내는데, 이 길은 사람에게도 순하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물길을 따라가야 산다는 말은 옛 사람들의 오랜 경험에 근거한 상식이다.
전국 직선도로에서 하루에 교통사고, 로드킬 등으로 죽어나가는 생명들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라. 번호도 없이 물길을 따라 굽이도는 거친 길이 실은 사람에게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다. 한국전쟁 이후 부쳐 먹을 땅이 없던 사람들과 실향민들은 이 길을 따라 물처럼 깊숙이 흘러들어와 화전과 마을을 일궜다.
‘내륙의 섬’ 비수구미 마을은 대한민국에 몇 남지 않은 오지마을 중 하나다. 한때 100여 가구 이상이 부대끼며 살았다는데 70년대 화전민 정리로 많은 주민들이 바깥으로 흩어졌다. 지금 마을엔 장 씨네, 김 씨네, 심 씨네 3가구가 전부다. 3가구 모두 민박과 식당을 겸하며 밭농사 등으로 소일하는 느린 삶을 살고 있다. 바깥으로 드나드는데 애로가 있을 뿐, 겨울에 춥지 않고 날 풀리면 기웃거리는 이들이 많아 사계절 자족하며 살 만하단다.
걷다가 허기진 속은 산채정식으로 채운다. 고사리, 씀바귀, 고들빼기, 취나물 등 각종 산나물이 한상 가득 오른다. 말리거나 데쳐서 풋기를 뺐지만 산나물은 산에서 온 것다운 흙의 향기로 풍요롭다. 아리지 않은 쌉싸름한 맛에 간간함이 곁들여져 그 맛이 일품이다. 개두릅은 장아찌로 만들어 쓴맛을 덜고 짭조름하고 새콤한 맛을 더했다. 제철인 곰취도 장아찌로 모습을 바꿔 밥 대신 막걸리를 부른다.
살짝 오른 취기에 걸어서 되돌아갈 오르막이 난감하다면 물길을 타면 된다. 3가구 모두 마을과 수하리를 오가는 보트를 직접 운행하고 있다. 마을에서 수하리 선착장까지 배로 5분이면 닿는다. 보트 후미에 이는 흰 물보라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 가는 간이선착장의 모습이 시원섭섭하다.
▶비수구미 마을에선 = 3가구 모두 숙박 가능. 1박 3만원, 산채정식 1인당 1만원. 장윤일 씨네 (033)442-0145, 심금산 씨네 (033)442-3952, 김상준 씨네 (033)442-0962.
정진영 기자/123@heraldm.com
'여행 기사 > 헤럴드경제 트래블 '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원도 영월) 죽어서 555년을 산 단종을 만나다 (0) | 2012.06.28 |
---|---|
(보령 외연도) 내일로 향하는 황금길, 외연도 (0) | 2012.06.07 |
(합천 황매산 철쭉기행) 막다른 봄에 자지러지고 (0) | 2012.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