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 장릉 등 단종과 관련된 흔적들을 직접봤을 땐 무덤덤했다.
그런데 기사를 쓰면서 어린 임금의 생애가 문득 사무치게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기사가 쓸데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자르고 냉정함을 유지하느라 애를 먹었다.
죽어서 555년을 산 단종을 만나다
2012-06-28 11:28
유배살이 했던 영월 청령포·관풍헌…어린 임금의 어가 옆엔 그의 비통한 삶을 지켜봤을 관음송의 비애가…
6월 말은 본격적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기에도, 방 안에 틀어박혀있기에도 난감한 때다. 피서 행렬은 7월의 가운데 능선을 꾸역꾸역 넘어가야 비로소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애매한 시절에 남들 다 알 만한 피서지에서 사람들과 부대낌 없이 보내는 피서는 어쩐지 허전하다. 피서 행렬은 여정을 피로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흥을 돋우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비키니도 여럿이 같이 입어야 즐겁고 폼 나지, 혼자 입고 돌아다니면 민망한 법이다. 화려한 피서는 곧 화려해질 시간으로 미뤄두자. 이맘때엔 대놓고 호젓한 곳에서 여유 부리는 피서가 ‘대끼리’(기사 원문에는 '최고'라고 수정돼 있지만 나는 어감상 '대끼리'가 좋다)다. 산 많고 사람 드문 강원도 내륙 영월은 여름의 한복판으로 접어들기 전 과도기를 보내기에 최적지 중 하나다. 도심에서 자진모리 장단으로 휘몰아치던 시간과 일상도 영월에선 진양조로 느리게 흘러간다.
죽어서 영월을 살리는 어린 임금
서울에서 빌딩숲을 벗어나 쉼 없이 달려드는 봉우리들을 2시간반가량 헤쳐 들어가면 강원도 영월 땅에 닿는다. 군내(郡內)엔 가장 낮은 잣봉(─峰·537m)부터 가장 높은 두위봉(斗圍峰·1466m)까지 해발 500m 이상 봉우리가 30여개나 솟아있다. 옛 사람들에겐 안팎으로 드나들기 쉽지 않은 이 같은 지형이 꽤나 험악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래서 지명도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란다’는 속뜻을 품은 영월(寧越)이다. 한때 번성했던 탄광도 문을 닫고 부쳐 먹을 땅도 많지 않은 영월을 먹여 살리는 것은 조선 6대 임금 단종(端宗·1441~1457)이다. 영월 곳곳에 두루 걸쳐있는 어린 임금을 둘러싼 슬픈 이야기와 흔적은 유무형의 관광자원으로 남아 외지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단종이 묻힌 장릉(莊陵·사적 제196호)이 지난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영월을 찾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살아서 베풀지 못한 선정을 저승에서 베푸는 어린 임금에 대한 군민들의 애정은 각별해 매년 한식(寒食)을 전후해 제를 올리고 축제를 열어 고혼(孤魂)을 달래고 있다. 지난 2007년엔 승하 550년을 맞아 국장(國葬)까지 치러줬다.
조카의 자리를 빼앗은 조선 7대 임금 세조(世祖·1417~1468)는 명분 없이 차지한 옥좌를 위협할지도 모를 무리들을 두려워해 어린 조카를 심산유곡에 처박았다. 단종은 적막강산 영월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자조하며 시를 짓고 소일했다. 유배 온 단종이 처음 머무른 곳은 청령포(명승 제50호)다.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 육륙봉(六六峰)으로, 동·서·북쪽 삼면은 곡류하는 서강(西江)에 막혀있다. 육륙봉의 별명은 살벌하게도 도산(刀山)이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들여다보기도, 내다보기도 쉽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면 물에 빠져 죽고 뒷걸음치면 절벽에 베어죽을 판이니 이만한 유배지도 찾기 어려울 듯싶다. 지금도 청령포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드나들 수 없는 오지(奧地)다. 도선료는 200원이다. 200원이면 열리는 초록빛 물길을 어려워했을 어린 임금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배에서 내려 소나무숲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단종어가(端宗御家)가 나온다. 어가는 단종의 유배 당시 거처로 지난 2000년에 복원됐다. 어가는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시종들이 기거하던 사랑채로 구성돼 있다. 옹색한 세간 너머 어린 임금의 구겨진 삶을 말없이 지켜봤을 600년 소나무 관음송(觀音松·천연기념물 제349호) 앞에서 비애가 느껴진다.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홍수로 청령포가 잠겼다. 단종의 거처는 재차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졌다. 단종은 관풍헌 앞 누각(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처지를 피를 토하며 운다는 두견새에 빗대 시구(詩句)로 울었다. 옛 신하들과 숙부 금성대군이 은밀하게 손을 뻗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세조는 조카를 사사(賜死)했다.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시신은 청령포 앞에 버려졌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동강(東江)에 몸을 던졌다.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하겠다”는 서슬 퍼런 어명을 내렸다.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어명을 거스르고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암장한 후 종적을 감췄다. 단종의 복위는 사후 240여년이 흐른 숙종 대에 와서야 이뤄졌다. 무덤은 그때서야 비로소 왕릉으로 정비됐다. 능호는 장릉(莊陵·사적 제196호)으로 명명됐다.
장릉은 한양에서 100리 밖에 떨어진 유일한 왕릉이다. 병풍석과 난간석도 세우지 않은 작은 왕릉이다. 석물도 간소하다. 벽지 구릉에 홀로 떨어진 작은 왕릉을 외롭지 않게 만드는 것은 장판옥(藏版屋)이다. 장판옥엔 단종을 위해 순절한 김종서·황보인 등 대신들을 비롯해 내관, 노비, 무녀, 궁녀 등 총 26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는 다른 왕릉엔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정조(正祖·1752~1800)의 명으로 세워졌다. 군민들은 매년 4월 단종제를 올린 후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配食壇)에서 이들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旌閭閣)도 능에서 멀지 않다.
강물과 봉우리가 세월로 빚어낸 비경
단종 유적과 더불어 영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은 한반도면 옹정리 선암마을의 ‘한반도 지형(명승 제75호)’이다. 서강(西江)이 오랜 세월 산간지대를 깊이 감아 돌아 침식과 퇴적을 거듭해 형성된 ‘한반도 지형’은 ‘1박2일’ 팀의 방문 이후 영월을 넘어 전국적인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에 ‘땅끝마을’ 해남과 포항의 호미곶까지 한반도의 모양을 쏙 빼닮았다.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전국에 몇몇 더 있긴 하지만 동고서저 지형까지 닮은 곳은 이곳뿐이다. 동쪽엔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절벽과 무성한 소나무 숲이, 서쪽과 남쪽 강물과 면한 곳엔 평야 지대와 갯벌을 닮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어 실제 한반도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월읍 방절리 서강가에 우뚝 솟은 높이 70m의 기암(奇巖) ‘선돌(명승 제76호)’은 ‘한반도 지형’과 더불어 또 다른 영월의 명물이다. ‘선돌’은 본디 하나의 덩어리였던 거대한 석회암이 오랜 세월 침식을 거듭해 갈라져 떨어져 나온 바위다. 벼랑 끝에서 수직으로 잘라낸 듯한 모양새가 신비로워 신선암(神仙岩)이라는 별명이 쉽게 이해된다. 비탈면에 빽빽하게 뿌리 내린 관목들이 등에 진 옥빛 강물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영월=글·사진 정진영 기자/123@heraldm.com
죽어서 영월을 살리는 어린 임금
서울에서 빌딩숲을 벗어나 쉼 없이 달려드는 봉우리들을 2시간반가량 헤쳐 들어가면 강원도 영월 땅에 닿는다. 군내(郡內)엔 가장 낮은 잣봉(─峰·537m)부터 가장 높은 두위봉(斗圍峰·1466m)까지 해발 500m 이상 봉우리가 30여개나 솟아있다. 옛 사람들에겐 안팎으로 드나들기 쉽지 않은 이 같은 지형이 꽤나 험악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래서 지명도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란다’는 속뜻을 품은 영월(寧越)이다. 한때 번성했던 탄광도 문을 닫고 부쳐 먹을 땅도 많지 않은 영월을 먹여 살리는 것은 조선 6대 임금 단종(端宗·1441~1457)이다. 영월 곳곳에 두루 걸쳐있는 어린 임금을 둘러싼 슬픈 이야기와 흔적은 유무형의 관광자원으로 남아 외지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단종이 묻힌 장릉(莊陵·사적 제196호)이 지난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영월을 찾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살아서 베풀지 못한 선정을 저승에서 베푸는 어린 임금에 대한 군민들의 애정은 각별해 매년 한식(寒食)을 전후해 제를 올리고 축제를 열어 고혼(孤魂)을 달래고 있다. 지난 2007년엔 승하 550년을 맞아 국장(國葬)까지 치러줬다.
조카의 자리를 빼앗은 조선 7대 임금 세조(世祖·1417~1468)는 명분 없이 차지한 옥좌를 위협할지도 모를 무리들을 두려워해 어린 조카를 심산유곡에 처박았다. 단종은 적막강산 영월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자조하며 시를 짓고 소일했다. 유배 온 단종이 처음 머무른 곳은 청령포(명승 제50호)다.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 육륙봉(六六峰)으로, 동·서·북쪽 삼면은 곡류하는 서강(西江)에 막혀있다. 육륙봉의 별명은 살벌하게도 도산(刀山)이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들여다보기도, 내다보기도 쉽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면 물에 빠져 죽고 뒷걸음치면 절벽에 베어죽을 판이니 이만한 유배지도 찾기 어려울 듯싶다. 지금도 청령포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드나들 수 없는 오지(奧地)다. 도선료는 200원이다. 200원이면 열리는 초록빛 물길을 어려워했을 어린 임금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배에서 내려 소나무숲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단종어가(端宗御家)가 나온다. 어가는 단종의 유배 당시 거처로 지난 2000년에 복원됐다. 어가는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시종들이 기거하던 사랑채로 구성돼 있다. 옹색한 세간 너머 어린 임금의 구겨진 삶을 말없이 지켜봤을 600년 소나무 관음송(觀音松·천연기념물 제349호) 앞에서 비애가 느껴진다.
청령포(명승 제50호)는 영월로 유배 온 단종이 처음 머무른 곳이다.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 육륙봉(六六峰)으로, 동ㆍ서ㆍ북쪽 삼면은 곡류하는 서강(西江)에 막혀있는 오지다. 후에 관풍헌으로 옮겨진 뒤 사사(賜死)된 단종의 시신은 청령포에 버려졌다. |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홍수로 청령포가 잠겼다. 단종의 거처는 재차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졌다. 단종은 관풍헌 앞 누각(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처지를 피를 토하며 운다는 두견새에 빗대 시구(詩句)로 울었다. 옛 신하들과 숙부 금성대군이 은밀하게 손을 뻗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세조는 조카를 사사(賜死)했다.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시신은 청령포 앞에 버려졌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동강(東江)에 몸을 던졌다.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하겠다”는 서슬 퍼런 어명을 내렸다.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어명을 거스르고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암장한 후 종적을 감췄다. 단종의 복위는 사후 240여년이 흐른 숙종 대에 와서야 이뤄졌다. 무덤은 그때서야 비로소 왕릉으로 정비됐다. 능호는 장릉(莊陵·사적 제196호)으로 명명됐다.
장릉은 한양에서 100리 밖에 떨어진 유일한 왕릉이다. 병풍석과 난간석도 세우지 않은 작은 왕릉이다. 석물도 간소하다. 벽지 구릉에 홀로 떨어진 작은 왕릉을 외롭지 않게 만드는 것은 장판옥(藏版屋)이다. 장판옥엔 단종을 위해 순절한 김종서·황보인 등 대신들을 비롯해 내관, 노비, 무녀, 궁녀 등 총 26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는 다른 왕릉엔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정조(正祖·1752~1800)의 명으로 세워졌다. 군민들은 매년 4월 단종제를 올린 후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配食壇)에서 이들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旌閭閣)도 능에서 멀지 않다.
장릉(莊陵ㆍ사적 제196호)은 한양에서 100리 밖에 떨어진 유일한 왕릉이다.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세조의 어명을 거스르고 청령포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암장했는데 240여년 후인 숙종 대에 와서야 왕릉으로 정비됐다. 병풍석과 난간석도 세우지 않고 석물도 간소한 작은 왕릉이다. 지난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강물과 봉우리가 세월로 빚어낸 비경
단종 유적과 더불어 영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은 한반도면 옹정리 선암마을의 ‘한반도 지형(명승 제75호)’이다. 서강(西江)이 오랜 세월 산간지대를 깊이 감아 돌아 침식과 퇴적을 거듭해 형성된 ‘한반도 지형’은 ‘1박2일’ 팀의 방문 이후 영월을 넘어 전국적인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에 ‘땅끝마을’ 해남과 포항의 호미곶까지 한반도의 모양을 쏙 빼닮았다.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전국에 몇몇 더 있긴 하지만 동고서저 지형까지 닮은 곳은 이곳뿐이다. 동쪽엔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절벽과 무성한 소나무 숲이, 서쪽과 남쪽 강물과 면한 곳엔 평야 지대와 갯벌을 닮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어 실제 한반도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월읍 방절리 서강가에 우뚝 솟은 높이 70m의 기암(奇巖) ‘선돌(명승 제76호)’은 ‘한반도 지형’과 더불어 또 다른 영월의 명물이다. ‘선돌’은 본디 하나의 덩어리였던 거대한 석회암이 오랜 세월 침식을 거듭해 갈라져 떨어져 나온 바위다. 벼랑 끝에서 수직으로 잘라낸 듯한 모양새가 신비로워 신선암(神仙岩)이라는 별명이 쉽게 이해된다. 비탈면에 빽빽하게 뿌리 내린 관목들이 등에 진 옥빛 강물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영월=글·사진 정진영 기자/123@heraldm.com
아래는 지면에 실리지 않은 다른 사진들
청령포 단종어가 인근의 관음송(觀音松·천연기념물 제349호)
영월읍 방절리 서강가에 우뚝 솟은 높이 70m의 기암(奇巖) ‘선돌(명승 제76호)’
한반도면 옹정리 선암마을의 ‘한반도 지형(명승 제75호)’. ‘1박2일’ 팀의 방문 이후 영월을 넘어 전국적인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전국에 몇몇 더 있긴 하지만 동고서저 지형까지 닮은 곳은 이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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