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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밥 버먼 저 <거의 모든 것의 종말>(예문아카이브)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2. 6.

 



내게 1992년은 휴거로 기억되는 해다.
당시 다미선교회라는 종교단체가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도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꽤 시끄러웠다.
다미선교회는 구체적으로 10월 28일이라는 휴거 일자까지 제시하는 바람에 더 주목을 받았다.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내가 사는 대전의 변두리 동네까지 휴거 관련 책자가 뿌려졌다.
주말마다 간식을 먹으러 교회에 다녔던 나는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혼자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마침내 휴거일자가 다가왔고, 내 공포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는 세상에 온갖 종말론이 판을 쳤다.
대부분 웃어넘길 이야기였지만, Y2K만큼은 꽤나 신빙성 있게 들렸다.
나는 코딩에 꽤 능숙한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컴퓨터의 날짜 표기 방식은 월-일-년이었고, 년은 네 자리 중 뒷부분 두 자리의 수만 입력했다.
저장장치의 용량이 턱없이 적어 1바이트라도 줄이려고 했던 과거의 흔적이 그때까지 남은 거다.
이 경우 1900년과 2000년은 똑같이 00으로 처리된다.
컴퓨터의 오작동을 충분히 우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군사 및 우주용 컴퓨터의 스펙은 안정성 문제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의 금융망이 마비되고, 원자력 발전소의 컴퓨터가 오작동해 방사능이 누출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핵폭탄이 갑자기 발사될지도 모른다는 괴담도 퍼졌었다.
나는 1999년 12월 31일 밤에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도시 전체에 정전이 발생하고, 핵폭탄이 날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할지 걱정하면서.
마침내 2000년 1월 1일 0시가 됐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길었다.
이 책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내가 앞서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과 비슷하다. 
이 책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종말이라는 자극적이고도 궁금한 소재를 바탕으로 우주와 지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흥미롭게 전하는 교양 과학 서적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저자는 지금까지 지구가 겪은 대격변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대격변이 다가올지 과학적인 근거로 예측하고 설명한다.
그중에는 일식이나 토성과 목성의 만남처럼 근거가 없는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고, 태양의 거대화 등 언젠가는 반드시 벌어질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언급된 종말론 시나리오 대부분은 우리가 생전에 경험할 일이 없는 그야말로 '우주적인' 사건이다.
빅뱅, 초신성, 대멸종, 은하의 충돌을 우리 생에 겪을 일은 없지 않은가.
꽤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던 석유 고갈로 인한 대혼란 우려도 쑥 들어간 지 오래다.
돌이 사라져서 석기시대가 끝난 건 아니니 말이다.

우주 기준으로는 10만 년, 100만 년도 찰나의 시간인데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그런 우주적인 사건을 두려워하는 건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이 우주에서 하루살이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무의미한 생일까.
이 책을 읽으니 오히려 종말에 관한 두려움보다는,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세계에 관한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더 커진다.
끊임없이 세상을 궁금해하는 게 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종말을 걱정하는 일보다 훨씬 즐거운 일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