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미래, 지구와 우주의 중심을 오가는 장엄한 대서사.
읽는 내내 무한한 공간감과 몽환적인 기분을 느꼈다.
그 느낌이 오래전에 올라프 스태플든의 고전 SF <이상한 존>을 읽으며 느낀 경이감과 비슷했다면 과찬이려나.
핑크 플로이드의 걸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재킷 이미지를 닮은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작품 속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달이기도 하고.
작품 속 세 이야기는 네트워크를 통한 확장 현실의 발달이 인류의 미래를 어떤 형태로 이끌어갈지 탐구한다.
이야기 속에서 구현되는 여러 기술은 논리적이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돼 현실감을 자아낸다.
이야기의 시간과 배경은 달라도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어 연작소설보다는 장편소설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인간의 기억과 의식이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네트워크에 업로드된다면, 그 디지털 신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인공지능을 인간이 아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작가는 발전한 기술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질문은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우주는 과연 하나만 존재하는지, 완벽한 우주는 생명조차 필요 없는 우주 그 자체가 아닌지, 신은 과연 존재하는지 등 철학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곳곳에서 불교적 사유가 엿보인다.
붓다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므로, 다른 곳에서 세상의 중심을 찾지 말라는 메시지가 묘하게 위로가 됐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메시지 같아서 말이다.
중간에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기술도 많고, 작가가 창조한 개념도 종종 등장해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온전히 소설을 이해했다는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소설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니 진입장벽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최근에 문학계에 대세로 떠오른 소프트 SF에 익숙해져 있다가, 진입장벽이 있는 SF를 읽으니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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