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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이경희 소설집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다산책방)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2. 2. 1.



블랙코미디로 시작해 사회 문제 비판을 지나 사랑으로 끝나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이야기 모음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 "이것도 좋아할 것 같고 저것도 좋아할 것 같아서 다 준비해봤는데 어때?"라는 질문을 받은 기분이다.
나는 "아주 좋았어!"라고 대답하고 싶다.

'살아 있는 조상님들의 밤'은 설날에 가족끼리 모여서 돌려 읽기에 딱 좋은 단편이 아닐까?
근래 읽은 단편 중 가장 웃긴 단편이었는데, 꼰대의 끝이 어디인지 펼쳐내는 상상력이 유쾌하다.
'신체강탈자의 침과 입'도 읽는 내내 미친놈처럼 키득키득 웃게 한 단편이었다
정말 하찮은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을 닮아 있어 더 웃겼다.
끝까지 진지해 보였던 '바벨의 도서관'을 읽을 때도 마지막에 인공지능이 죽어라 찾아 헤매던 책의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마냥 유쾌하기만 했다면 새벽이 가까워져 오는 이 시간에 잡설을 끼적이진 않았을 테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파업 문제를 다룬 '우리가 멈추면'을 읽을 때는 고용노동부 출입 기자로 일했던 2년여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동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르포 기사 이상으로 진지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다.
작가가 묘사하는 우주의 풍경과 기술이 정말 그럴듯해서 실감 나는 작품이었다
'다층 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은 욕망의 근원을 들여다보며 자유와 속박의 차이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마지막에 실린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였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이상적인 미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개인적인 사랑이 어떻게 편견과 차별을 넘어 보편적인 인류애 나아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여운이 깊게 남았던 작품이다.

최근에 챙겨 읽는 한국문학 신간 중에 SF의 비중이 늘었다.
SF라는 장르를 떠나, 그 자체로 좋은 메시지와 이야기를 담은 신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SF 붐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 단계는 넘어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