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년 전 <침묵주의보>로 백호임제문학상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내게 상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눈에 작품은 한국 문학에서 보기 드문 사회파 소설이어서 마음에 드는데, 작가의 출신이 마음에 걸렸던 거다.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했으니 장르 소설 작가 같은데, 순문학 작가가 아닌 장르 소설 작가에게 상을 주는 게 옳은가?
그게 그들의 고민이었다.
한 심사위원은 장르 소설 작가에게 상을 줄 수 없다며 시상식장에 오지 않았다.
다른 심사위원은 시상식 자리에서 내게 장르 소설 같은 걸 쓰지 말라고 진지하게 당부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SF를 비롯한 장르 소설을 바라보는 문단의 시선이 어땠는지 보여주려고 내 경험을 예로 들었다.
문학동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현대문학, 문학사상 등 주요 문예지에 SF 등 장르 소설이 실린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 작가의 SF 단행본이 대형 문학출판사 여기저기서 출간되는 풍경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는 계간 어션테일즈의 창간이 대단한 사건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SF는 앤솔로지, 무크지, 웹진 등을 통해 독자와 소통해왔는데 비정기적 간행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최근 주요 문예지도 SF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곁가지였다.
정기적으로 나오는 SF 전문 문예지는 어션테일즈가 처음이다.
지금까지 한국 문학(이른바 순문학이라고 불리는)에서 문예지는 문단을 형성하고 담론을 주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어션테일즈의 창간은 SF도 기존 한국 문학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신호라고 봐야 한다.
그 신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가격이 다소 비싼 편(2만5000원)이지만, 하드커버를 씌우고 디자인에도 많은 신경을 써서 소장 가치를 높였다.
인터뷰, 엽편소설, 단편소설, 중편소설, 에세이, 리뷰 등 다양한 양질의 콘텐츠를 실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작품을 실은 작가들 모두 젊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젊은 작가의 유입이 많다는 건 그만큼 시장이 커지고 있고 장래도 밝다는 방증이다.
창간호라고 해서 마냥 좋은 소리만 하고 싶진 않다.
한국 문학이 독자를 넷플릭스 등 다른 콘텐츠에 빼앗긴 이유는 단순하다.
나보다 한국 소설 신간을 부지런히 챙겨 읽고 흔적을 남기는 작가가 많지 않을 테니 그 이유를 자신 있게 말한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면적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데, 소설의 서사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작가 본인의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사가 고만고만하고 그 자리에서 맴도는 거다.
주인공 중에 제대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
대한민국 성인 대부분이 직장인인데 그런 서사에 공감하겠는가?
본인의 경험이 일천하면 <미생>을 그린 윤태호 화백처럼 취재를 철저하게 해야 하는데, 그런 작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내면에 침잠할 수밖에.
어션테일즈를 비롯해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SF 단편과 단행본을 접하면서 식상하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다.
학생이나 연구원 등 과학 전공자나 종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지나치게 자주 눈에 띈다.
편집자 등 특정 직업군이 단골로 등장했던 과거 한국문학처럼.
아무래도 그 분야에 있는 작가가 많아서 벌어지는 현상일 테지만, 이런 식으로 몇 년 더 흐르면 장담하는데 SF도 시시하다는 말이 나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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