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신간을 제때 읽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사놓고 읽지 못한 작품이 많은데, 강박을 버리니 읽을 책이 많아졌다.
덤으로 신간을 사는 데 쓰는 돈도 굳었다.
이 작품도 사서 서재에 꽂아 놓은 지 4년이 넘은 작품인데 이제야 펼쳤다.
서재에서 이 작품과 유난히 자주 마주쳤는데 이상하게 손이 안 갔다.
지난해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고 실망한 터라 더 그랬다(특히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는 오버였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서재에서 읽지 않은 구간을 뒤지다가 또 이 작품과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최근 한국 문학 신간을 읽는 일은 페미니즘 서사를 읽는 일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 작가가 많고 그들이 내놓는 이야기도 많다.
이야기가 많은 만큼 식상하게 느껴졌던 이야기도 적지 않다.
이 작품은 '유니크'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모두 성폭력 피해자임과 동시에 누군가에겐 약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설정 자체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등장인물 모두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할수록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새겨진다.
작가는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숨는 과정을 대단히 솔직하고(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제하지 않은 문장으로 풀어내는데, 그 거친 호흡이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울린다.
그들이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아니었는지를 돌아보며 오롯이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간절하게 바라는 과정이 섬세하다.
무거운 주제를 마치 추리소설처럼 이야기를 쌓아 한곳으로 모아 터트리는 구성도 읽는 데 흥미를 더했다.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헤매다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빠져나온 기분이다.
뒤늦게 읽고 머리를 한방 세게 맞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읽어보길 잘했다.
<대불호텔의 유령>보다 좋았던 작품이다.
훨씬 더!
작가의 신간을 더 챙겨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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