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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정은우 장편소설 <국자전>(문학동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2. 10. 3.

 



제목과 표지로 이 작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예상해보자.
'국자'라는 단어에 전통적 서사물을 의미하는 '전'(傳)이 붙어있다.
아마도 '국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이고, 적절한 풍자를 곁들였을 테다.
조리기구 국자와 같은 주인공의 이름, 표지에 실린 젓가락과 접시 이미지를 보니 음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오른손에 당당히 궐련을 든 여성의 실루엣으로 짐작하건대, '전'으로 불리는 전통적 서사물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내 예상대로 모두 들어맞았다.
그래서 실망했느냐고 물어보면 Nope!
안티히어로물(이견이 있겠지만 히어로물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에 따뜻한 가족 서사가 결합하면 어떤 케미가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해보시라.
이 작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재미있다.
심지어 '작가의 말'까지 재미있어 이마를 쳤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전 세계에 곳곳에서 랜덤으로 초능력자가 태어난다는 게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정 연령을 넘기면 초능력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고, 검사 결과에 따라 능력자와 일반인으로 구분된다.
능력자는 대한민국에서 어떤 쓸모에 있느냐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고, 높은 등급일수록 사회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

능력자는 일반인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는 존재이지만, 모든 능력자가 그런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검사 결과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능력자는 사회에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으며 철저히 탄압받는다.
마치 군사정권 시절에 좌익 사범의 가족이 연좌제로 억압을 당했던 것처럼.
시대가 바뀌어 탄압 수준은 줄어들었지만, 부적합 능력자는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피 대상이다.

이 작품은 '국자'와 그녀의 딸 '미지'의 시점,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인간을 쓸모에 따라 차별하는 세태를 유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짚어나간다.
'국자'는 가족에게 능력을 숨기고 살아왔는데, 그 능력은 어처구니없게도 손맛이다.
'국자'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데, 초능력이라고 말하기에는 꽤 소박하다.
할리우드 히어로물과 비교하면 초능력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 소박함이 '국자'를 분투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비현실적인 설정을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이 작품이 히어로물이었다면 작품 속 정부가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며, 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를 착취하는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끼지 못했을 테다.

원고량이 상당한 작품인데, 가독성이 훌륭해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읽는 내내 눈앞에 영상이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예언하는데, 이 작품은 반드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제작사가 있다면 간 보지 말고 얼른 판권을 사가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나는 이 작품이 당연히 베스트셀러 순위에 상위권에 있을 거로 여겼는데 어느 서점 차트에도 보이지 않아서 놀랐다.
국내에서 첫손을 꼽는 문학 출판사에서 단행본을 출간했다는 버프를 받았는데도 순위에 없다니.
잘 만든 책이 잘 팔리는 게 아니고, 못 만든 책이 안 팔리는 게 아님을 다시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