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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구한나리 소설집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돌베개)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2. 10. 1.

 


문방사우를 의인화한 '서재야회록'처럼 문구류를 의인화한 이야기의 모음인 줄 알고 가볍게 펼쳤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문구류를 소재로 사춘기 소녀의 일상을 그리는데,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의외로 묵직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어른들의 승진 경쟁 못지않은 치열한 입시 전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향한 의문, 자녀를 마치 소유물 취급하는 어른들의 욕심, 다문화 가정 등 민감한 주제를 문구류로 엮어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청소년 소설이니 뭐 별것이 있겠냐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펼쳤다간 강한 흡인력에 꽤 놀랄 테다.

2020년대 학교의 풍경과 학생의 심리를 묘사하는 디테일도 엄청나다.
현직 교사라는 작가의 직업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나는 요즘 10대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내 20세기 말 학창 시절과 비교하며 흥미롭게 읽었다.
성인 소설과 다른 차원의 여운이 인상 깊었다.
사소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묘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망가뜨린 친구의 물건을 원래대로 되돌려 친구의 마음을 달래고 싶고, 빌린 지우개의 모서리의 지저분해진 부분을 닦아서 돌려주고, 모두가 외면할 때 먼저 말을 걸어주며 다가오고.
이런 표현이 닭살 돋을지도 모르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10대의 고민은 과거와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 시절 고민의 무게가 과연 지금보다 가벼웠는가?
나이가 들면 경험과 지혜는 쌓일지 몰라도, 사람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다.
10대도 어른 이상으로 섬세한 자기만의 취향과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40대인 내가 10대였던 나를 돌아보니 말이다.

여담인데, 나는 작가의 단행본을 꽤 오래 기다렸다.
작가는 10년 전 장편소설 <아홉 개의 붓>으로 제4회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을 받았는데, 3회 수상자였던 나는 시상식에 참석해 작가에게 꽃다발을 건넸었다.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은 비록 5회로 끝났지만, <아홉 개의 붓>은 역대 수상작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작품이었다.
이보다 상의 취지와 잘 어울렸던 수상작이 없었다.
그 이후 작가가 웹진에 단편을 발표하고 앤솔로지에 참여하는 모습을 종종 봤지만, 단행본 소식이 한참 동안 없어 아쉬웠는데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