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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박찬일 산문집 <밥 먹다가, 울컥>(웅진지식하우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5. 14.

 



80년대 말 장마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밥그릇을 엎었다.
며칠째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밖으로 나가서 놀지 못하는데, 밥상에는 반찬 하나 없이 매끼 간장과 밥만 올라왔다.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마가린을 밥에 같이 비벼주셔서 잘 먹었는데, 이틀쯤 지나자 마가린이 떨어졌는지 간장만 밥상에 올라왔다.
나는 반찬 투정을 부리다가 밥그릇을 엎었고, 어머니는 나를 모질게 때렸다.
그날 이후 밥상에 반찬으로 간장만 상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간장을 보면 문득 떠오르는 오래된 일이다.

바나나킥과 양파깡을 보면 어린 시절 잠결에 봤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밤중에 나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머리맡에 바나나킥과 양파깡을 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잠에서 깨어난 나와 동생은 눈치 없이 좋다고 과자 봉지를 뜯었다.
이후 며칠 동안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어머니는 아주 안 들어올 작정이었다더라.

잡곡밥에 섞인 좁쌀을 보면, 시장에서 파는 좁쌀베개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먹여야 하는데 집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베개를 뜯어 좁쌀을 꺼내 불려 나를 먹였다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지금도 우는 아들을 달래려고 좁쌀베개를 뜯는 어머니의 마음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산문집에 담긴 여러 이야기는 그동안 세월에 묻어두고 살았던 많은 기억을 되살려준다.
작가는 다양한 음식을 매개로 음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친절하게 풀어놓으며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소환한다.
대체로 가난하고 서글픈 기억이다.
화려한 요리를 만들면서 정작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요리사들의 모습, 케첩에 물을 타서 핫도그에 뿌려주던 어린 시절 노점상의 박한 인심, 맛있는 성게알을 먹기 위해 들어가는 해녀의 수고로움, 중식 요리사와 양식 요리사의 서로 다른 흉터, 먹고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관해 고민했던 순간 등.
여기에 "구도심은 힘이 없다. 해소 기침하는 노인 같다" 같은 시를 닮은 아름다운 문장이 덤으로 올라가 읽는 맛을 더한다.

그 위에 내 기억도 포개져 가슴이 울렁거린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또래 아이가 푸세식 화장실에 빠져 똥독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던 일, 달동네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며 리어카로 이삿짐을 나르던 일, 장마철에 잠을 자다가 다급하게 깨어나 쓰레받기로 방까지 밀려 들어온 빗물을 바깥으로 퍼내던 일, 달동네에 산다고 아랫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을 맞아 코가 내려앉았던 일 등.

기쁜 기억보다 슬픈 기억으로 더 많이 채워져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글쎄다.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누구도 자신의 선택으로 태어날 수 없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 그 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 산문집을 덮으며 들었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