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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심필 장편소설 『어제 만나자』(서랍의날씨)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8. 20.

 



장편소설이 장편답지 않게 점점 짧아지는 세상에서, 어지간한 장편소설 두 권 이상 분량의 작품이라니.
그런데 경장편소설보다 빨리 읽히고,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간다.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인공은 50대 퇴물 건달로 마약 범죄에 얽혀 동생을 잃은 채 산채로 관에 갇혀 죽음만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어이없게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전날 아침에 깨어나고, 다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이틀 전 아침이다.
한번 잠이 들 때마다 주인공은 하루씩 과거로 역행한다.
미래를 아는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동생을 죽인 원수와 자신에게 엿을 먹인 놈들에게 복수를 시도하려 하나 문제가 있다.
아직 동생을 죽이지 않은 과거의 원수를 미리 죽이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어떤 명분을 만들어야 원수를 죽일 수 있을지를 두고 주인공은 나름 치열한 두뇌 게임을 벌인다.

설정이 이러하니 판타지나 타임슬립물이 아닌가 싶겠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애매하고 서글프다(왜 그런지는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 설정에 관한 설명은 스포일러여서 생략하겠는데, 무척 신선하고 동시에 무척 허무하다.
이런 복수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과연 복수이기나 한 걸까.
 
읽는 내내 땀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하는 피카레스크였다.
정을 줄 만한 등장인물이 하나도 없다.
폭력이나 마약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비정한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샘 패킨파의 「와일드 번치」나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더럽고 찝찝한데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