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어렸을 때 한국에서 살다가 사춘기 무렵 아버지와 미국으로 이주, 미국으로 함께 오기로 했던 어머니와는 연락 두절, 그리고 피부는 파란색.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설정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소수자 of 소수자 of 소수자이다.
소설을 읽지 않아도 주인공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얼마나 지독한 차별과 혐오에 시달려 왔을지 짐작할 수 있는 설정이다.
이 작품은 21세기 들어 미국에서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과 한국에서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을 교차해 시간순으로 보여주며, 차별과 혐오의 역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반복돼 왔는지 처절하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가슴에서 천불이 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녀석들은 어려서 철이 없다고 치자.
동네 어른들뿐만 아니라 보안관, 심지어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까지 차별과 혐오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 인류애가 바삭바삭 부서진다.
주인공을 아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거나 크게 다치며 곁에서 사라진다.
주위 상황은 온통 주인공이 제정신을 붙들지 못하게 하는 것들뿐이다.
주인공의 한국 이름이 영어로 '감옥'을 뜻하는 'Jail'과 발음이 비슷한 '재일'이라는 설정도 예사롭지 않다.
C8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싶다가도 문득, 인정하기 싫은데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그리고 자문하게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차별과 혐오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동참했던 경험이 없는가?
부끄럽지만 그렇다는 말은 못 하겠다.
그것이 이 작품의 힘이다.
이 암울해 보이는 작품이 마지막까지 비극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어떻게든 존엄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주인공의 태도 때문이다.
홀로 넓은 세상으로 나온 주인공은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한계를 확장하며 자기만의 깨달음에 도달한다.
"나는 더 이상 백인을 우러르지도, 흑인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선망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인간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나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일터와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 애국심과 규율로 무장한 벙커에 숨어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291페이지)
세상에는 파란 피부를 가진 사람이 더 많이 태어나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하고, 미흡하나마 이들이 다른 인종과 특별히 다른 점이 없다는 사실도 밝혀지기 시작한다.
앞으로 더 넓은 세상에서 이들과 연대할 주인공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만만치 않겠지만 희망이 엿보인다.
메시지와 읽는 즐거움 모두를 갖춘 훌륭한 장편소설이었다.
'독서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발 소설집 『도망친 곳에서 만난 소설』(빈종이) (0) | 2024.08.27 |
---|---|
김홍 소설집 『여기서 울지 마세요』(문학동네) (0) | 2024.08.25 |
심필 장편소설 『어제 만나자』(서랍의날씨) (0) | 2024.08.20 |
박산호 산문집 『긍정의 말들』(유유) (0) | 2024.08.20 |
정은경·이동은·오세연 『여름을 달려 너에게 점프!』(안전가옥) (0) | 2024.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