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하지 않은 자의식,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리는 슬픔을 담은 목소리...
흐린 가을 날 커피 한 잔과 함께라면 더 없이 좋을 수작.
앨범 재킷과 속지는 붉은 실로 제본돼 소책자 형태로 엮여있다. 붉은 실의 일정한 패턴은 재킷의 아이보리 빛깔 바탕 위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동ㆍ서양의 설화 속에서 붉은 실은 연인 사이의 운명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묘사되곤 했다. 수록곡들의 테마 역시 모두 설화 속 붉은 실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과하게 꾸미지 않은 속지엔 국판 30절 판형의 시집 속 시처럼 운율에 맞춰 넉넉하게 가사가 배치돼 있다. 앨범 곳곳엔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회화들이 실려 있는데, 이는 심플한 속지에 무게감을 부여하는 시각적 효과를 준다. 루시아의 내면에 집중된 듯한 수록곡들의 가사는 청자에게 그리 친절한 편은 못된다. 테이블에 차 한 잔을 두고 앨범의 러닝 타임에 맞춰 시집을 읽듯 천천히 속지를 읽어나가는 감상법이 어울리는 앨범이다.
수줍은 사랑 고백을 피아노와 스트링의 잔잔한 선율에 실은 첫 트랙 ‘소중한 사람’은 앨범의 문을 부드럽게 열어주는 소품이다. 이 앨범에서 가장 큰 스케일을 보여주는 두 번째 트랙 ‘I Can’t Fly’는 음악적으로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선언하는 루시아의 자화상처럼 들린다. 첫 트랙의 잔잔했던 스트링 선율은 이 곡에선 뚜렷한 기승전결로 격정적인 느낌을 주는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보컬과 가사와 어우러져 극적인 요소를 충분히 살려내고 있다. 그루브감 넘치는 감각적인 트랙 ‘필로소피’는 라이브에서 더 많이 사랑 받는 곡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망설이는 어깨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늦었나 봐요”, “잔소리마저도 듣기 좋고 혼나도 하나도 언짢지 않아” 등 여성이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울 화법과 내러티브가 돋보이는 ‘그대의 고요’와 ‘보통’은 앨범에서 가장 매력적인 트랙들이다. 발라드 ‘세이비어(Savior)’가 특별히 부족하지 않음에도 타이틀곡으로서 아쉬운 이유는 이들 곡의 개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밋밋한 뒷맛 때문이다.
‘아이 스틸 러브(I Still Love)’와 마지막 트랙 ‘신이 그를 사랑해’는 앨범에서 가장 무겁고 긴 여운을 주는 수록곡들이다. 지난 10월 파스텔뮤직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에세이북 ‘조금씩, 가까이, 너에게’(북클라우드)엔 루시아의 쓸쓸한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몇 토막이 담겨 있다. 에세이의 내용을 통해 이들 곡과 가사의 배경에 대해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몇몇 방송사가 ‘아이 스틸 러브’에 심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는데, 가사의 배경을 감안한다면 다소 부당한 처사로 보인다.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는 일은 알지 못하는 것들로부터 오는 불안감과 직면할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가슴에 품은 사표를 감히 바깥으로 꺼내들지 못하는 이유도 대개 이와 같다. 월급에 중독된 기간과 용기의 반비례 관계는 슬프지만 진실이니 말이다. 짐작할 수 없는 내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용기는 생각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바로 지켜보는 이의 따뜻한 시선이다. 루시아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사실상 첫 홀로서기에서 꽤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얻어냈다. 그 용기와 노력에 박수와 따뜻한 시선을.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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