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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휴먼다큐> 뒤늦게 핀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3. 1. 10.

장사익 선생님과의 인터뷰...

음악 담당기자를 맡은 뒤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

1996년 '찔레꽃'으로 나를 매료시켰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직접 눈 앞에서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그 앞에서 기타를 들고 자작곡도 불렀다.

무엇보다도 그의 곡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인터뷰를 즐기는 데 도움을 줬다.

장사식 선생님도 한참 아랫 것이 자신의 노래를 다 알고 있으니 신이 나서 즉석으로 노래를 부르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분께 짜장면도 얻어먹었다. 하하하~

 

<쉼 휴먼다큐> 뒤늦게 핀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부러움의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드는 인생은 더러 있지만, 감동을 주는 인생은 많지 않다. 전자는 대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유리된 무용담을 닮아 있어 헛헛한 뒷맛을 남긴다. 그러나 후자는 소박한 삶이어도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이는 무용담 특유의 과장된 수사 대신, 진정성이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소리꾼’ 장사익(63)의 인생사는 후자로 수렴한다.

임진년(壬辰年)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세밑 맑고 시린 날, 서울 종로구 홍지동 소재 장사익의 자택을 찾았다. 가파른 골목을 파행하며 거슬러 오르자 ‘장사익’이란 문패를 건 붉은 벽돌집이 보였다. 약속 시간에 맞춰 왔건만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집주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철문을 열고 들어와 대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묵묵부답이다. 대문 역시 잠겨 있지 않았다.

너른 마당으로 겨울 햇살이 쏟아졌다. 마당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들러붙은 민들레 등 초본(草本)과 이끼에선 계절답지 않은 풋기가 돌았다. 담장 너머로 선명하게 펼쳐지는 인왕산 능선은 이곳의 행정구역이 서울특별시임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베란다 바깥에 매달린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에선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FM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많은 자동차들이 도로를 내달렸지만, 소음은 이곳까지 닿지 않아 고요했다. 서울답지 않은 풍경에 취해 마당을 서성이며 솟대를 바라보던 기자의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두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직업들을 떠돌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첫 앨범을 낸 장사익의 인생사는 우리 시대 전설 중 하나다. 그는 “지금 가수들은 처음부터 가수로 활동하며 인생을 배우는데, 난 인생을 배운 뒤 가수가 됐다. 뒤늦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추운데 뭐하고 계셔유? 오실 줄 알고 미리 문을 다 열어 놓았는데. 어서 올라 오셔유.”

2층 베란다에서 장사익은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충청도 사투리를 쏟아냈다. 4집 ‘꿈꾸는 세상’(2003) 수록곡 ‘아버지’에서 “얘야, 문 열어라!”라고 외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장사익은 얼굴 곳곳에 깊게 패인 주름으로 웃었다. 그는 이마와 눈가의 깊은 주름으로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잘 찾아 왔구나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미소였다. 현관 바깥으로 내려온 그는 반갑다며 기자의 손을 맞잡았다. 미소만큼이나 따뜻한 손이었다.

장사익은 자택 2층 거실로 기자를 이끌었다. 별다른 세간이 보이지 않는 거실은 호젓했다. 젬베(아프리카 전통 타악기) 옆에 놓인 보면대와 클래식 기타는 이곳이 장사익의 연습 공간임을 무언으로 알려줬다. 보면대엔 ‘목포의 눈물’ 기타 코드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기타의 4번째 줄은 비어 있었다. 장사익은 “늘 그 줄만 끊어져유”라며 멋쩍게 웃었다. 널찍한 통유리에 비친 인왕산은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였다. 통유리는 인왕산의 풍경을 사시사철 담아내는 살아 있는 액자로 기능했다.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긴다는 전통 건축의 ‘차경(借景)’ 개념이 이곳 거실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취해 창 밖을 힐끔거리는 기자에게 장사익은 날개를 편 독수리 모양을 한 바위와 부처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설명하며 뿌듯해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사본이 통유리와 가까운 벽에 걸려 있었다. 바짝 마른 나무 두 그루와 판잣집 한 채…. 거실의 정취는 세한도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다기(茶器)에 무말랭이를 담아 뜨거운 물에 우려내 잔에 따라냈다. 무말랭이차의 구수한 맛과 향기는 다기처럼 질박했다.

▶일상의 뒤편에 묻어둔 노래의 꿈=보험회사ㆍ무역회사 사원, 가구점 총무, 독서실 사장, 카센터 직원 등 두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직업을 자발없이 떠돌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첫 앨범을 낸 장사익의 인생사는 이미 우리 시대의 전설 중 하나다. 인생 후반기를 고민해야 할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열어젖힌 장사익의 인생사는 56세에 종9품 말단 벼슬 능참봉으로 시작해 80세에 정승 반열에 오른 남인(南人)의 거두 미수 허목(許穆ㆍ1595~1682)의 삶만큼이나 극적이다. 이미 많은 기사들이 사골마냥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인생사이지만, 전설은 듣고 또 들어도 흥미로운 법이다.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장구재비였다.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은 듯 하지만, 처음부터 노래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목청이 좋았던 그는 웅변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웅변 연습을 시작했시유. 웅변을 정말 잘하고 싶었지유. 목을 틔워야 된다는 생각에 중학교 3학년 때까지 5년 동안 산에 올라가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를 질렀지유. 가수가 되고자 발성 연습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니 굽이굽이 돌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때부터 노래 부를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 아닌가 싶네유.”

질긴 노래와의 인연보다 다급한 것은 생활이었다. 선린상고로 진학한 장사익은 1967년 9월 졸업을 앞두고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고교 재학 시절 유행가를 곧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었던 장사익은 이미 가슴에 가수의 꿈을 품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낙원동 가수 연습실 생활을 병행했던 장사익은 1970년 광주 31사단 문선대(문화선전부대)에 입대했다.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김추자의 ‘봄비’를 멋들어지게 불렀던 장사익은 문선대 공연을 본 학생들 사이에 ‘31사 봄비 아저씨’로 통했다. 팬레터도 많이 받았다. 장사익은 문선대 시절을 가장 즐거운 추억 중 하나로 추억했다. 문제는 제대 후였다.

“그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 직업을 선택하면 평생 뿌리를 박는다는 마음으로 일했지유.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1972년 제대 후 당연히 입대 전에 다녔던 보험회사로 복직하려 했는데 그 회사가 망해버린 것 아니겠어유? 갈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1974년 오일쇼크로 다시 한 번 세상이 뒤집혔지유. 회사는 저 같은 상고 출신들의 모가지부터 쳐내던데….”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잘못 채워진 첫 단추는 걷잡을 수 없이 인생을 벼랑으로 몰아갔다. 가구회사에 다니다가 회사를 직접 차려도 봤지만 쉽지 않았다. 무역회사 사장 노릇도 잠시 해봤지만 얼마 안 가 무너지고 말았다. 서초동에서 독서실을 운영해 보기도 했다. 장사익의 평생 소원은 월급 100만원을 매달 꼬박꼬박 받아보는 일이었다. 소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장사익의 마지막 밥벌이는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 직원이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카센터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며 호구지책을 이어갔지유. 카센터 운영이 잘 되지 않다 보니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일도 많았고. 문득 ‘이게 아닌데’란 생각이 들데유? 진짜 해 보고 싶은 걸 3년만 제대로 해 보자란 생각으로 카센터를 그만뒀어유. 더 내려갈 곳이 없으니 오히려 편안해지더이다. 당시 제 현실을 윷판에 비유하자면 저는 말 네 개를 모두 잡힌 상황이었지유. 뒤집어 생각하니 저는 이제 앞선 말들을 잡는 일만 남은 겁니다. 처음에 던진 윷이 ‘도’가 나와 한 칸밖에 나아가지 못해도 ‘빽도’가 나오면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뒤늦은 결심이 가져온 인생 역전=어렸을 때부터 태평소 소리가 좋았다. 동네에 태평소 잘 부는 아저씨가 하나 있었다. 장사익은 저녁마다 둑에서 태평소를 부는 아저씨 옆에서 소리를 들었다. 1980년 초반부터 틈틈이 단소, 피리, 태평소를 배우고 익혔던 장사익은 무작정 사물놀이 멤버 이광수를 찾아가 태평소를 불게 끼워 달라고 간청했다. 그때부터 그는 김덕수 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잡았다. 이후 그는 생전 처음으로 의미 있는 성취를 맛보게 된다.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에 뽑힌 데 이어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결성농요’로 대통령상,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금산농악’으로 장원에 올랐다. 그렇게 1년 반을 보냈다. 그러나 장사익은 엉뚱한 곳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곳은 바로 공연 뒤풀이 장소였다.

한바탕 공연을 펼친 날이면 어김없이 뒤풀이로 술판이 벌어졌다. 술과 담배를 못하는 장사익은 노래로 어울렸다. 그가 장르로 정의내릴 수 없는 독특한 창법으로 불러재낀 ‘봄비’ ‘동백아가씨’ ‘님은 먼 곳에’ 등의 노래에 뒤풀이에 모인 사람들은 넋을 놓았다. 넋 놓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긴 그는 장사익은 딱 한 번만 노래를 해 보자는 생각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1994년 11월,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주선으로 신촌 예극장에 첫 무대가 마련됐다. 100석 공연장에 400명이 몰려들었다. 이틀 동안 무려 800명이 장사익의 공연을 찾았다. 폭발적인 성공이었다. 그리고 장사익의 인생은 바뀌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지유. 지가 노래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제대로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갈팡질팡했던 25년의 세월은 저의 길을 찾았던 시간이 아닌가 싶네유. 세월이 거름이었습니다. 지금 가수들은 처음부터 가수 아닙니까? 가수로 활동하며 인생을 배워유. 그러나 지는 인생을 배운 뒤 가수가 됐어유. 뒤늦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후회는 없네유.”

▶자신을 닮은 노래로 세상을 울리다=내친김에 장사익은 1995년 ‘하늘 가는 길’이란 타이틀로 데뷔 앨범까지 내놓았다. 신승훈, 김건모, 솔리드, DJ.DOC, Ref 등 수많은 인기 가수들이 번갈아가며 차트를 점령하던 당시, 홀연히 등장한 이 앨범은 입소문만으로 수십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통곡하듯 표정을 무너뜨린 채 노래를 부르는 장사익의 모습을 담은 재킷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들은 앨범의 첫 곡 ‘찔레꽃’에 마음의 빗장을 풀며 눈시울을 적셨다.

장사익의 조용한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평단의 호평이 뒤따랐다. 강헌 음악평론가는 “장사익의 노래들은 세기 말과 세기 초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위대한 위안”이라고 극찬했다. 이듬해인 1996년, 장사익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가진 단독 공연을 매진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데뷔 앨범을 발표한 지 17년이 흐른 지금, 장사익은 정규 앨범만 7장을 가진 대한민국 대표 소리꾼으로 우뚝 섰다. 장사익을 세상에 알린 ‘찔레꽃’. 이 곡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인생사만큼이나 설화적이다.

“한때 잠실에서 살았어유. 1994년 5월쯤인가? 집 앞 길을 걸어가는데 문득 바람결에 좋은 향기가 스며있는 것 아니겠시유? 장미꽃 향기인줄 알고 향기를 따라가 봤는데 장미꽃이 아니었시유. 바로 뒤에 숨어 있던 찔레꽃 향기였시유.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데유? 이게 바로 나로구나!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내 처지가 찔레꽃을 닮았구나! 가사처럼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울었시유. 한참을 울고 돌아와서 만든 노래가 ‘찔레꽃’이지유. 그 노래가 제 인생을 바꿔줬지유.”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장사익의 노래 중엔 대중음악이 잘 다루지 않는 죽음을 주제로 다룬 노래들이 많다. 상여소리를 즉흥적으로 풀어낸 ‘하늘 가는 길’, 고려장을 당하는 노모가 아들이 혼자 내려올 길을 걱정해 솔잎을 뿌리는 내용을 담은 ‘꽃구경’을 비롯해 천상병 시인의 ‘귀천’, 정호승 시인의 ‘허허바다’, 서정주 시인의 ‘황혼길’, 허형만 시인의 ‘아버지’ 등 죽음을 주제로 다룬 많은 시들이 장사익의 소리에 엮였다. 장사익은 죽음을 알아야 삶의 소중함이 선명해진다고 역설했다.

“세상살이 중 열에 아홉은 힘들고 어렵지 않은가유? 춥고 더운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아유. 어두운 밤에 조명이 밝으면 별이 제대로 보이던가유?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밝아져유. 어두울 땐 멀리서 보이는 불빛 하나가 희망이지유. 어둠을 알아야 빛이 소중해져유. 마찬가지로 죽음을 알아야 삶이 소중해져유. 열에 아홉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어도 남은 하나의 기쁨 덕분에 살아갈 만하지 않던가유? 그리고 슬플 땐 울어야해유. 비 온 뒤에 거리가 깨끗해지듯 슬플 때엔 제대로 울어야 마음을 비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유.”

기자와 인터뷰를 나누던 장사익은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곤 했다. 짧은 노래는 그 어떤 논리적인 답변보다 명확하게 질문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장사익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여전히 힘찼다. 언제까지 노래를 부를 생각이냐는 질문에 그는 “요즘 세대는 아흔까지 살아유”란 간접적인 표현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아흔까지 노래를 부를 작정이냐는 ‘돌직구’ 질문에 그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나이 아흔의 소리꾼을 한 사람 정도 가질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장사익은 지난 2009년 환갑 기념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바 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미래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