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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X파일] 오래전 추억을 소환하는 목소리…김창기, 동물원 그리고 김광석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3. 7. 22.

김창기, 동물원 그리고 김광석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청춘의 배경음악'은 얼마나 빈곤하고 삭막했을까?

그리고 이러 벅찬 감정이 과연 나와 일부만의 감정일까?

 

 

[취재X파일] 오래전 추억을 소환하는 목소리…김창기, 동물원 그리고 김광석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지난 주 서울은 2000년 이후 최다였다는 열대야와 간헐적 폭우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불볕더위에 나가 떨어져 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들과 물 폭탄 사고 피해가 곳곳에서 동시에 속출했죠. 심신이 허해질수록 좋았던 추억의 색깔은 더욱 짙어지는 모양입니다. 지난 주말 더우나 추우나 늘 사람이 많은 서울 혜화동 대학로, 나이 지긋한 이들이 오래전 낭만을 추억하기 위해 학전블루 소극장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지난 19일부터 21일까지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그룹 동물원 출신 싱어송라이터 김창기의 2집 발매 기념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김창기는 지난 5월 정규 2집 ‘내 머리 속의 가시’를 발표했습니다. 2000년 1집 ‘하강의 미학’ 이후 무려 13년 만의 새 앨범이었죠.

13년의 공백기 동안 김창기는 소아정신과 의사이자 생활인으로 충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는 기자와 가진 인터뷰(헤럴드경제 2013년 5월 27일자 27면 참조)에서 “동물원을 탈퇴한 뒤 야심차게 이범용과 ‘창고’라는 듀오를 결성해 발표한 앨범과 솔로 앨범의 곡들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이 두려웠다”며 “내가 행복해야 듣는 이도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음악을 손에서 놓았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랬던 그를 다시 음악인으로 소환한 사람은 그의 어린 딸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인 김창기의 딸은 아빠가 가수로 활동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습니다. 왜 아빠는 가수인데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는 딸의 핀잔에 김창기는 지난해 9월부터 마치 공부하듯 매일 한 곡씩 써내려가며 감각을 되살렸다고 합니다. 역시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나 봅니다.

 

 

 

 

팬들에겐 공연의 주인공, 주제, 공연장 모두 남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널 사랑하겠어’ 등을 부른 동물원이 없었다면 많은 이들의 ‘청춘의 배경음악’은 얼마나 빈곤했을까요? 이 노래들을 만든 김창기는 ‘청춘의 배경음악’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사람 중 하나입니다. 공연장 학전블루는 고(故) 김광석(1964~1996)이 생전에 ‘1000회 라이브 공연’ 기록을 세운 전설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김창기 정규 2집의 타이틀곡은 ‘광석이에게’입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지니 당시의 기억을 공유하는 관객들의 마음은 이래저래 무장해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는 21일 마지막 날 공연을 찾았습니다. 김창기의 노래 실력은 여전히 별로입니다. 그러나 김창기가 끝내주게 노래를 잘 불러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공연장을 찾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그저 최선을 다해 불렀고, 기교 없는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 진솔하게 다가왔습니다. 목소리의 빈 공간을 채운 것은 객석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등 익숙한 ‘청춘의 배경음악’이 연주되자 관객들은 박자에 맞춰 열심히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마냥 청순해 보이던 김창기가 정규 2집 수록곡들을 부르며 “모두 지옥에나 꺼지라고 해(‘내 머릿속의 게임’)”와 “이런 우라질! 오! 이제 와서 무슨 짓이냐고 머리를 달고 다니지만 말고 한 번은 사용해보라고(‘지혜와 용기’)” 등의 다소 과격한 가사들 쏟아낼 땐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 같아 신선했습니다. 무협지에서 흔히 보이는 표현 중에 반노환동(返老還童)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반노환동은 노인이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협지에선 늙은 고수들이 극강의 내공을 쌓아 도로 젊어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죠. 문득 김창기를 바라보며 반노환동이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무대 위 김창기의 얼굴은 여전히 해맑아 보였습니다.

 

이날 공연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 게스트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김광석의 히트곡 ‘서른 즈음에’를 만든 강승원, ‘광야에서’를 작곡한 문대현, 김창기와 함께 동물원에서 활동했던 박경찬, 이원희 KBS PD(현 제작기술서비스부 제작서비스팀장)가 그들입니다. 특히 강승원과 문대현이 직접 부르는 ‘서른즈음에’와 ‘광야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노래였기 때문에 객석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박경찬은 김창기와 함께 훌라춤을 추며 ‘널 사랑하겠어’를 불러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습니다. TV 애니메이션 ‘원피스’와 ‘명탐정 코난’ 주제가의 작사가이기도 한 이원희 PD는 예상치 못한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음악인의 친구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앙코르 첫 곡은 의미심장하게 시작됐습니다. 다시 무대에 오른 김창기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관객은 없었을 겁니다. 그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이가 들으니 눈물이 많아졌다”며 정규 2집 타이틀곡 ‘광석이에게’를 불렀습니다. 김창기의 목소리엔 촉촉하게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간주 중에 입을 앙다문 그의 무대 뒤 스크린 위로 오래 전 김광석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김창기는 “친구를 잘 팔아먹고 있다”며 멋쩍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너의 덕분에 아직 살아남아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의 너보단 내 곁에 있는 네가 필요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지만 함께 취해주는 사람들뿐이고, 무언가 말하려 하지만 남들이 먼저 다 하고 떠나갔고. 네가 날 떠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 너를 미워하고 또 날 미워해야 했어. 왜 내게 말 할 수 없었니? 그렇게 날 믿지 못 했니? 왜 그렇게 떠나가야 했니?”

공연 후 뒤풀이로 이어진 술자리에서 이원희 PD는 “나이 든 사람들만 공연장을 찾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며 “모든 유행을 초월해 아직도 이런 음악이 젊은이들에게 유효하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진다”고 고무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김창기의 앨범과 노래가 아이돌처럼 ‘음원 줄세우기’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심신이 허한 어느 주말, 눈앞에서 김창기가 서툰 목소리로 부르는 ‘청춘의 배경음악’을 듣고 싶은 욕심은 기자 혼자만의 욕심일까요? 당신의 노래 가사 일부를 빌어 기자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나를 원해주길 원해(정규 2집 수록곡 ‘원해’ 中)”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