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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주산) ‘가깝고도 먼 나라’ 카페리호는 반나절, 마음은 이역만리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0. 11. 13.

‘가깝고도 먼 나라’ 카페리호는 반나절, 마음은 이역만리
[금토일]3박4일 일본여행
데스크승인 2010.10.15  지면보기 |  12면 정진영 기자 | crazyturtle@cctoday.co.kr  
   
▲ 일본 오이타(大分)현 우사(宇佐)시에 위치한 우사신궁에서 중추절 축제 방생회가 열리고 있다. 방생회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고 살생을 경고하는 의미로 치러지는 제례인 동시에 수확의 계절 가을을 기리는 행사로 이날 많은 일본인들이 신사를 참배하며 가족의 평안을 빌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진정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다. 말장난 같은 이러한 동어반복만큼 대한민국과 일본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 너머에 놓여있는 무언가를 표현하기에 좋은 말은 없을 듯 싶다. 부산과 일본의 관문 시모노세키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250㎞로 서울과의 그것보다도(450㎞) 훨씬 가깝다. 이는 쾌속선으로 불과 3시간이면 닿는 거리다. 심지어 쓰시마 섬과 부산 사이의 최단 직선거리는 50㎞에 불과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우겨볼만하다.
   

그러나 실제로 눈에 들어오는 일본은 첫인상부터 낯선 나라다. 가까이 있는 나라니 얼추 비슷하겠지라는 생각은 어색한 억양의 한국어로 금지물품 소지여부를 묻는 출입국담당 직원들의 낯선 유니폼 색상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벽보 속 과장된 크기와 색깔의 히라가나 폰트와 우리와 비슷하되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주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나라보다 다소 좁은 도로 위에서 좌측통행하는 수많은 경차들의 행렬 속에서 우리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은 중국과 더불어 배로 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다. 커다란 여행가방과 여객기로 대표되는 수많은 해외여행 목적지 중 몇 안 되는 예외다. 대표적 해상이동수단인 페리호는 비행기보다는 느리나 상대적으로 훨씬 저렴하다는 장점 때문에 실속을 찾는 여행객들로부터 각광받고 있다. 그러하기에 인천, 부산 등 국제여객선항구는 일본과 중국으로 향하는 페리호에 탑승하기 위한 승객들로 늘 성황이다. 항구까지 먼 발걸음을 팔아야하는 수고로움과 긴 운행시간이 단점이지만 다양한 선내 편의시설과 오락 공간, 갑판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은 승선 자체를 단순한 이동이 아닌 여행의 일부로 느끼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다.

취재진은 혜초여행사의 협조를 받아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구주산(久住山) 트레킹 및 주변 명소를 돌아보는 페리호 여행에 동행했다.

   
여행 첫날 선상에서 바라본 롯데백화점 광복점

[쓰시마섬 북단을 지나 뱃길 12시간]

첫째날 (10월 7일)


오후 7시, 여장을 풀고 갑판으로 나오니 승선할 적에 찾아든 박모(薄暮)가 오간 데 없다. 짧은 10월의 가을은 벌써 어둠속으로 줄달음치며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빛으로 가득한 항구 주변 고층 건물들, 먹빛 하늘과 바다너머 아스라한 집어등 불빛… 2층 갑판에서 바라본 부산항 주변의 풍경은 꽤나 이국적이다. 유목민적 사유에 익숙지 못한 나는 항구만으로도 이국을 바라본다.

다음날 아침이면 정말 이국(異國)이다. 동서남향은 바다에, 북향은 바다 아닌 바다에 가로막혀 섬이나 다름없는 조그만 땅에 깃들어 사는 농경민족의 후예인 내게 있어 정착지에서 벗어난 일상이란 유전자 속에 내재된 두려움 섞인 설렘이다. 출발시간은 오후 10시, 갑판 위 정지된 풍경만 바라보기에는 너무 긴 대기시간이다.

배정된 숙소는 다인실, 이른바 2등 객실로 통칭되는 다인실은 너와 나라는 경계를 자연스럽게 부수는 공간이다. 선상의 밤은 수면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커다란 방 가운데 둥글게 모여 앉은 객실 동기들은 자연스럽게 짐 속에서 4홉들이 소주 몇 병과 안주거리들을 꺼냈다. 종이컵이 채워질수록 저마다 얼굴에 피는 꽃도 붉어진다. 어딘 가로부터 굉음이 울린다. 종이컵 속 소주의 표면위로 파장이 인다.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하나 둘씩 일어나 갑판으로 향했다.

박모가 남긴 찬바람에 사느래진 철제 난간에 기대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았다. 항구 불빛이 멀어지자 등대 불빛이 가까워지고, 등대 불빛이 소실점으로 사라지자 먹빛 하늘과 수평선이 만나 접히는 곳에서 수많은 집어등들이 은하수처럼 아련하게 반짝인다. 배는 끊임없이 수면과 마찰하며 바다의 진동을 갑판위로 정직하게 전달했다. 진동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객실로 기어들었다.

자정 무렵, 1층 로비의 액정 모니터는 쓰시마 섬 북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심코 열어본 휴대폰 속 액정 화면에 나타난 전파의 강도는 여전히 통화에 유효했다. 대한민국 휴대폰은 쓰시마 섬에서도 통했다. 이쯤 되면 정말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우겨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댔다. 객실에 드러눕자 바다의 숨결이 진동으로 느껴온다. 꿈결처럼 들려오는 파도의 기별에 몸을 맡기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둘째 날 구쥬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먹었던 도시락

둘째날 (10월 8일)


1. 구쥬산 산행

욕실 창문너머 비치는 아침 하늘이 습기를 잔뜩 머금고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설마 비가 내리지는 않겠지"라는 불안한 기대를 갑판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습한 바닷바람이 깬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물 냄새가 짙다. 바다의 것이 아니다. 하선과 동시에 흡습점 한계에 도달한 시모노세키(下關) 하늘의 구름은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전용버스는 대합실에서 벗어난 일행을 싣고 칸몬(關門)대교를 지나 큐슈(九州)섬으로 향해 빗줄기를 뚫었다.

오후 12시 30분, 버스는 약 3시간여를 달린 끝에 오이타현(大分) 구쥬산(久住山) 1330m 고지 마키노토 고개(牧ノ戶)에 도착했다. 비에 젖은 고개는 고요했다. 음영을 드리우는 짙은 구름에 짓눌려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고개 위에서 주변 봉우리들은 운무에 가려 홀연히 솟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빼어난 풍광으로 일본 100대 명산으로 꼽힌다는 구쥬산은 1786.5m의 높이로 아소-구중(阿蘇―九重) 국립공원 지역을 이루고 있는 9개 봉우리의 일부다. 코스 초입의 시멘트 오르막 계단을 제외하면 높이에 비해 크게 부담스러운 구간이 없어 트레킹 코스로 인기다.

   
20여분정도 오르막에서 땀을 빼면 본격적으로 능선이 시작된다. 능선은 구쥬산 정상부근까지 3㎞남짓 이어진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끝 모르고 뻗어있는 산줄기는 눈에 다 채워지지 않아 먹먹하다. 키 작은 나무마다 여름내 머물렀던 초록이 지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은근히 끼어든 단풍은 초록과 그러데이션을 형성하며 어색한 동거 중이었다. 지난 여름 향기마저 푸르렀을 구쥬산에도 가을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쿠츠카케산(沓掛山·1503m) 봉우리 부근을 지나 능선을 넘어서자 날선 홋쇼산(星生山·1762m)이 날카롭게 눈가를 찌른다. 삭막하다. 새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름 모를 곳곳의 절경은 운무 뒤에서 애를 태웠다. 바람으로 벗겨내기에는 역부족인 두터운 운무 속에서 일말의 실망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를 때쯤 문득 썩은 계란 냄새와 흡사한 냄새가 코를 스쳤다. 유황 냄새다. 냄새는 이곳이 활화산 지대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시켰다. 활화산(活火山)… 나는 살아있는 산을 걷고 있었다. 미미하게 실린 유황 냄새는 묘한 감동으로 다가와 지친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150분 걸린 구쥬산 정상은 구름바다]

거대한 화산분지 니시센리하마(西千里兵)를 지나 잦아드는 능선에 미끄러지듯 내려서면 대피소와 화장실이 나타난다. 그 앞에서 구쥬산 정상이 코앞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꽤나 가파른 데다 운무에 싸여있어 더욱 가파르게 느껴졌다. 운무를 뚫고 아래로 내려오던 사람들이 곧 정상이라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산행 2시간 반 만에 구쥬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정상을 증명하는 것은 해발고도를 가리키는 표지뿐이다. 운무에 둘러싸인 정상주변에서 확보되는 시야는 10m 내외에 불과했다. 그러나 더 오를 곳이 없는 곳에 두발로 직접 올랐다는 자부심의 공감대속에 뭉친 꼭대기의 사람들은 산 정상의 절경에 아쉬워하지 않는 듯 했다. 이국의 절경을 눈과 렌즈에 담지 못해 아쉬워하던 내게 그들의 건강한 웃음은 "흐리고 비오는 날씨까지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잠언처럼 들렸다.

 
 
  ▲ 구주산(久住山)으로 향하는 능선은 해발고도에 비해 완만해 트레킹 코스로 인기다. 10월의 구주산은 지쳐서 탈색돼가는 초록위에 스며드는 단풍으로 증명되는 가을의 길목으로 이방인을 맞았다.  
 

[일본 3대 온천여행지 벳부 이국적]

   



2. 벳부의 밤

오후 6시, 하산 후 트레킹 최종 목적지 쵸자바루(長子原)에 옹기종기 모인 50여명의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벳부(別付)로 향했다. 벳부는 아리마(有馬), 노보리베스(登別)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온천 여행지로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풍부한 용출량과 편리한 교통으로 오래전부터 온천으로 각광받아온 벳부는 이제 다양한
숙박시설편의시설을 갖춘 종합휴양지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버스는 1시간여를 달린 끝에 목적지인 카메노이(龜井)호텔에 도착했다. 배정된 방에 여장을 푼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호텔 안에 마련된 온천탕에서 산행에 지친 몸을 녹였다.


TV를 켜자 브라운관 속 이국의 밤거리가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의 밤거리는 고요한 편이다. 휴양지라면 흔히 떠올리는 불야성은 일본에서는 낯선 이야기다. 8시 30분이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 일본에서 야간 영업을 하는 곳이라고는 일부 선술집과 빠찡코, 편의점이 전부다. 그 사실을 익히 들어서 알면서도 이국의 밤거리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 나는 카메라와 우산을 들고 호텔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비오는 벳부의 밤거리역시 예외 없었다. 세계적인 휴양지임에도 불구하고 벳부의 밤은 고요했다. 가로등조차 드문 벳부의 밤거리는 구쥬산의 유황 냄새만큼이나 낯설었다. 자판기의 천국답게 수많은 자판기 형광등 불빛이 교교하게 가로등 불빛의 결핍을 채우고 있었다.

이국의 속살을 엿보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나는 점점 더 먼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빛을 따라가자 큰 도로가, 큰 도로를 따라가자 벳부역이, 벳부역을 벗어나자 선술집 골목이 이어졌다. 일본어 회화는커녕 아는 단어조차 손꼽으면서도 겁도 없이 홀로 이국의 밤거리를 걸으며 현지인들을 관찰하는 일은 두렵고도 짜릿하다.

 

 

3. 아… 대책 없는 방황 속의 아름다움이여 (지면 관계상 실리지 않는 부분)

 

 비 내리는 이국(異國)의 밤거리에서 준비 없는 호기심은 위태로웠다. 지갑 속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와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는 나의 부족한 언어적 소양과 기억력 앞에서 무력했다. 습기 머금은 바람은 다급한 날숨에 엉겨 입가에서 뒤채여 술렁였고 빗방울은 젖은 어깨위에서 종단속도로 아프게 부서졌다. 확신이 잦아드는 언저리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름답던 이국의 고샅은 어두운 미로로 돌변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대책 없이 나선 야행이 부른 비극(?)이었다.

 나는 지난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3박 4일간 취재차 일본을 찾았다. 따라붙은 가이드 덕분에 별다른 불편 없이 이틀째 구주산(久住山) 산행 일정까지 무사히 마친 나는 적당히 건방져져 있었다. 벳부(別付)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온천탕 속에서 여독을 푼 나는 고질병과도 같은 방향감각 결핍증도 잊은 채 겁도 없이 숙소 바깥으로 나섰다.

 일본의 밤거리는 고요하다. 밤 8시 30분이면 편의점, 선술집, 파친코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러나 이국의 밤거리를 눈에 담고 싶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의 발걸음은 호텔로 향하는 길목을 거스르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사운대는 우리와 다른 것들을 향한 소박한 호기심은 점점 더 먼 곳을 향했다. 일본어 회화는커녕 아는 단어조차도 손꼽는 나는 불안감 깃든 짜릿함 속에 이국의 고샅 곳곳을 한참 동안 훑다 뒤돌아섰다.

 그런데 호텔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걸어도 나의 발걸음은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주택가 고샅만을 맴돌 뿐이었다. 오가는 택시가 종종 눈에 띄었으나 호텔의 이름은 머릿속에서 오리무중이었다. 입이 있어도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한 침묵 속에서 나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생애 첫 철저한 고립이었다.

 대책 없이 우왕좌왕 하는 발걸음 사이로 계속된 불안한 사색은 뜬금없이 반나절 전 구주산 에서 가이드와 나눴던 대화에서 멈칫했다. 하산 길에 가이드는 구주산(久住山·1786.5m)이 구중산(九重山) 아홉 봉우리의 정상이긴 하나 가장 높은 곳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실제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중악(中岳·1791m)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정상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가이드의 대답은 대책 없는 고립 속에 화두로 던져졌다. 가장 높지 않아도 얼마든지 정상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인정해 주는 사회. 그네들의 판단 기준은 보이는 것 너머 불가해한 먼 곳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불안에 흔들리던 나의 발걸음은 소박한 간화선(看話禪) 속에서 점차 평안을 찾았다. 막연히 흐르던 발걸음은 어느새 고립조차도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방인의 소리 없는 외침에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바다 건너편에서 메아리는 스스로 도달한 아름다움 끝에 정상이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듯 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호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엉뚱한 방향으로 걷고 있다 여기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만난 호텔을 향한 감정은 애증이다. 애증은 에비스 맥주의 부드러운 거품을 타고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0월 9일 이른 새벽, 짙푸른 하늘에 짓눌려 서걱거리던 바람은 미명 속에서 새로운 하루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아! 이 대책 없는 방황 속의 아름다움이여… 앞으로 아름다워 지기 위해 열심히 읽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써야겠다.

 



[애니메이션 배경이 된 유후인 마을]

   



셋째날 (10월 9일)

1. 동화 속 마을 유후인

전용버스는 아침 일찍 호텔서 식사를 마친 일행들을 싣고 유후인(由布院)으로 향했다. 많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 유후인은 아기자기하고 이색적인 풍경으로 매년 40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동화 속 목가적인 분위기 때문에 특히 여성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마을이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유후인 마을을 배경으로 자신의 대표작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든 이후 마을은 더욱 더 유명세를 타게 됐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잉어의 비늘이 석양에 부딪히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호수 긴린코(金鱗湖)는 자그마한 크기에도 불구,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유후인 마을의 대표적 명소로 자리 잡았다. 바닥으로부터 샘솟는 온천수로 인해 호수의 표면은 늘 은은한 물안개로 자욱하다. 정갈하나 소박한 200여개의 상점들은 그 자체로 마을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더하는 소품의 역할을 하고 있다. 킨쇼(金賞) 고로케도 마을의 유명세에 한 몫 하는 별미다. 일본 고로케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킨쇼 고로케는 방문객들이 줄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다. 바삭한 튀김옷 속에 담긴 으깬 감자의 부드러운 맛이 일품으로 유후인 마을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별미다.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맛으로 가격은 하나에 150엔이다.

       

2. 지옥 아닌 지옥 가마도지옥

다시 벳부로 머리를 돌려 유황재배지 유노하나(湯ノ花)를 눈요기 하듯 잠시 경유한 버스는 이어 가마도지옥(かまど地獄)으로 향했다. 가마솥을 뜻하는 일본어 가마도는 하치만궁(龜八幡宮) 신사 축제 때 온천수 증기로 밥을 지어 신전에 바친 데서 유래한다. 이를 방증하듯 가마도지옥의 입구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전시돼 있다. 6개의 크고 작은 온천못으로 이루어진 가마도지옥은 계절과 온도에 따라 온천물 색이 바뀌는데 온도가 낮으면 황색 높으면 하늘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온천물로 익힌 달걀이 별미로 팔리고 있었다. 1개를 먹으면 3년이나 젊어진다는 말에 피식거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개를 구입했다. 가끔 간식삼아 먹는 훈제계란과 별다를 것 없는 맛이지만 무료 족욕 온천에 발을 담근 채 군입을 다시는 것도 그 나름대로 소박한 즐거움이다. 무엇을 먹느냐만큼이나 어디서 먹느냐도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는다.

       

3. 백제의 흔적 우사신궁

정오 무렵, 버스는 일본 3대 신궁 중 하나인 우사신궁(宇佐神宮)에 도착했다. 725년 창건된 우사신궁은 오우진천황(應神天皇)과 하치만신(八幡神) 등을 모신 곳으로 일본 전역의 4만여 하치만궁(八幡宮)의 총 본산이다. 그런데 이곳은 백제와의 관련성으로 한국인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다. 바로 오우진천황이 일본으로 도래한 비류 백제의 후손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백제 멸망기를 전후해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도래했고 그들이 한때나마 정치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시기에 세워진 신사인 만큼 꽤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다. 주차장 구석의 키 작은 벚나무에 꽃송이 몇 개가 철을 모르고 곁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계절 속에서 그 계절의 것이 아닌 것을 바라보는 일은 은밀한 즐거움이다. 주차장 너머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만나 윤기 있는 소리를 싣고 온 바람이 여린 꽃잎을 핥는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답게 신궁 내부의 건물과 석조물들은 곳곳에 이끼를 훈장처럼 걸치고 있다. 때마침 신궁 안은 중추절 방생회 축제로 한창이었다. 오래된 신궁 안에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낯선 곡조를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수많은 어린학생들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통의상을 갖춰 입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고집스런 표정 속에서 과거를 현재화시키고자 사력을 다하는 그들의 의지를 읽었다. 그렇게 과거이자 현재인 이곳은 오래된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다. 변화하며 버리고 채우는 것만이 발전이고 진보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 여관 등등 오래 묵은 것 랭킹을 꼽으면 어지간해서 수위를 내주지 않는 일본은 올해도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 2명을 배출했다.

       

[1068m 칸몬대교는 큐슈~혼슈 연결]

4. 귀향

버스는 다시 2시간여를 달려 칸몬대교를 건너 큐슈 섬에서 벗어나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마지막 목적지는 시모노세키항과 칸몬대교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메카리(和布刈)전망대다. 참으로 맑다. 이틀 내내 흐리고 비 오던 일본의 하늘은 떠나기 전에야 비로소 쪽빛을 드러냈다. 참으로 심술궂다. 1068m 길이로 큐슈와 혼슈를 잇는 칸몬대교는 맑은 하늘 아래서 거대한 규모로 오가는 배들을 굽어본다. 항구는 잔잔한 바닷물을 포근하게 안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입지한 메카리 전망대는 귀국 전 마지막 인증 샷의 명소로 손꼽히는 장소다. 바람이 수만 개로 쪼갠 물비늘 위로 오후 햇살이 영롱하게 구른다. 반짝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참동안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못했다.

입국 때보다 짧아진 출국심사를 마친 뒤 페리호에 승선하자 다시 첫날밤의 일상이 그대로 반복된다. 선상의 밤은 수면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3일간 얼굴을 마주보며 친숙해진 사람들은 지난 일정의 추억들을 안주거리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과 수면 시간을 맞바꾸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마지막날 (10월 10일)

3박 4일의 일정이라고는 하나 마지막 날은 하선 후 해산 외에 별다른 일정이 없다. 새벽 6시 30분, 밤새 물살을 가른 페리호는 부산항 앞바다에 가닿아 있었다. 부족한 잠을 억지로 쫓으려 갑판에 올랐다. 아직 잠결인 부산항 앞바다 한가로운 수평선 위로 태양빛이 아득했다. 물빛과 하늘빛이 만나 온통 짙푸른 세상을 가르며 솟아오르던 태양은 잔물결 위로 수많은 금빛 작살을 내리 꽂았다. 선연히 빛나는 물비늘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동네 앞 고샅 주변 연보랏빛 쑥부쟁이와 은행나무 열매 구린내가 그리웠다. 숲에서 떨어져야 숲이 보이듯 고작 3박 4일 일정이지만 그새 집밥 같은 일상의 소박함이 그리웠나 보다. 그래서 향수(鄕愁)는 향수(香水)보다 짙은가 보다.

日시모노세키=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