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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대청호반 드라이브) 색동옷 입은 길 사이로 가을이 탄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0. 11. 13.

색동옷 입은 길 사이로 가을이 탄다
[금토일]늦가을 대청호반 드라이브
데스크승인 2010.11.05  지면보기 |  12면 정진영 기자 | crazyturtle@cctoday.co.kr  
   
 
  ▲ 대청호반 옆으로 가을의 끝을 아쉬워하는 단풍이 절정이다. 나무와 나무가 살갗 부비며 ‘가을’을 내려놓으니 길도 익고 길손의 마음도 익는다. 이 길을 천천히 달리며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산화하는 ‘늦가을’을 만나보라. 대청호=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가을볕 받아 바스러지는 갈대 속에서 소멸의 언어를 읽는다. 자신의 진액을 모두 하얀 꽃으로 승화시켜 기갈해진 빈 갈대 줄기 속으로 시린 새벽 물안개가 스민다. 물안개너머 주인 잃은 낡은 배는 들리지 않는 사랑노래를 싣고 헤맨다. 안개처럼 홀연히 강변을 덮은 갈대는 물러갈 때 역시 홀연히 흔적을 지울 심산인 모양이다.

사랑하는 것들은 늘 빨리 떠나가 버려 힘겹고, 새로운 것들은 익숙해지기 어려워 힘겹다. 실패한 사랑이 실패했음으로서 그립듯, 시작하는 듯 끝나버리는 가을은 차창 밖 그늘진 하루너머 닿지 않는 한 해 동안 이루지 못한 것들과 함께 손을 흔들어 애잔하다.

멎어가는 한 해의 절정을 눈에 담고자 하는 아쉬움 섞인 한숨은 비어가는 산으로, 들로, 강으로 사람들을 양떼 몰듯 밀어내고 있다. 그러나 가을의 끝물은 홀로 곱씹어야 제 맛이다. 평형을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절박함으로 느리게 가는 여름을 견뎌낸 미련한 사람과 텅 빈 갈대 줄기는 꽤나 닮았다. 가을의 끝물과 눈물 역시 꽤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가을이기에 허락되는 이 같은 청승은 다크 초콜릿처럼 달콤 쌉싸래하게 목구멍을 핥는다.

대청호는 지난 1980년 대전 대덕구 미호동과 충북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 사이의 금강 본류를 가로막는 댐의 건설로 형성된 인공호다. 대전 대덕구·동구, 충북 청원군·옥천군·보은군까지 물줄기를 뻗치고 있는 대청호는 저수면적 72.8㎢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인공호가 빚어낸 주변의 풍경은 전혀 인공스럽지 않아 난감하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한때 산이었을 봉우리가 물안개 속에서 솟았다 저물기를 되풀이한다. 물길이 지루해 질 때쯤이면 숲길이 찾아오고, 숲길이 잦아들면 호반이 눈에 든다. 목적지가 사람을 부르지 아니하고 길이 사람을 부르니 이보다 난감할 수 없다. 이 같은 난감함이 대청호 드라이브 코스로 수많은 차량들을 불러들여 엔진을 상기시키고 기진한 기름통 게이지에 붉은 낙관을 찍는다.

대청호반 드라이브의 본격적인 시작은 대청댐에서 벗어나 청주 방향을 따라 대청교에서 좌회전해 오가리 3거리로 접어들면서부터다. 굽이를 따라 도로가 쉴 새 없이 몸부림치므로 속도는 줄이는 게 옳다. 봄과 여름이 호반 주변에 그렸던 발랄한 수채화는 가을을 맞아 파스텔 톤으로 정돈돼있었다. 도로 주변의 풍경은 뚝뚝 떨어지는 단풍물을 머금어 누렇다가 붉어지길 반복했다.

   
▲ 사진=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늦가을 호반의 풍경은 자동차 안에서 바라봐도 일품이나 제대로 조감하려면 드라이브 중간에 마주치는 현암사에 올라야 한다. 드라이브 코스 중간에 대청댐전망대가 있지만 현암사에서 바라보는 그것보다는 못하다. 산 아래 주차장에 자동차를 뉘어놓고 15분 정도 가파른 철계단과 오솔길을 걸어 오르면 호반에 잠긴 봉우리들이 다도해처럼 펼쳐진다. 비탈길을 타야하므로 수고롭기는 하나 호반을 굽어 바라본 뒤 마시는 약수 한잔은 그 수고로움과 충분히 교환할만하다.

구룡산 자락 벼랑에 깃든 현암사는 백제 때 창건된 절로 대청호와 청남대를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이 때문에 현암사는 한때 폐사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삼엄했던 5공 군사정권 시절, 청남대가 바라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현암사에는 늘 청남대 경호원들이 상주했다. 당시 대청호반 주변은 사진촬영조차 허락되지 않는 장소였다. 현암사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경호실의 감시 대상이었다. 창건 이래 최대의 불편을 겪었던 현암사는 지난 2003년 4월 청남대의 개방으로 비로소 평안을 찾았다. 전설처럼 느껴지는 이 같은 이야기는 불과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과거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문의면 부근 드라이브 코스는 빼어난 풍광으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붙잡는 구간이다. 특히 문의취수장과 인접한 호반 주변은 매년 이맘때면 은빛 물결로 반짝이는 갈대밭을 향한 ‘찍사’들의 짝사랑으로 분주하다.

갈대가 피어있다. 누군가는 갈대를 억새라 부르고, 누군가는 억새를 갈대로 부른다. 늦가을 서정 앞에 갈대와 억새의 식물학적 구분이 무슨 의미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냐마는, 갈대를 당당히 억새라 부르는 일도, 그 반대의 일도 마음 한 구석에서 찜찜하기는 매한가지니 집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

일단 둘은 자생지가 다르다. 습한 곳에서 자라는 갈대는 늪이나 호수, 강변 등에서 군락을 이룬다. 그러나 억새는 야산과 들녘의 벗이다. 또한 둘은 꽃의 색과 모양이 다르다. 갈대와 억새 모두 가을에 꽃을 피운다. 그러나 갈색에 가까운 갈대꽃과는 달리 억새꽃은 흰색에 수렴한다. 또한 갈대꽃은 서로 엉기어 피어나는 반면, 억새꽃은 가지런히 피어난다. 마지막으로 둘은 크기와 굵기가 다르다. 갈대 줄기는 억새에 비해 굵고 키도 커서 전체적 억새보다 강인한 느낌을 준다. 2m이상 자라나는 갈대와 달리 억새의 성장은 1m 내외에서 멈춘다. 억새는 갈대와 비교해 이름만 억새다. 그러므로 문의면에 자생하는 갈대는 분명히 갈대다.

새하얗게 눈부시기 만한 억새와 달리 갈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새벽녘 물안개 속에서 부대끼는 갈대밭은 회백색으로 촉촉하게 빛나 몽환적이다. 반면 낙조에 물든 갈대밭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장엄하게 일렁인다. 더 이상 생명으로써 기능하지 않는 껍데기로 담담한 수묵화와 강렬한 채색화를 번갈아 그려내는 갈대밭 앞에서 늦가을의 서정을 견뎌내기란 버거운 일이다.

   
▲ 전업작가들이 문의분교를 개조해 만든 마동창작마을.
문의대교를 넘어서 10여분 정도 달리다 보면 좌측으로 문의문화재단지가 보인다. 대청댐 완공으로 수몰된 지역의 문화재를 한데 모은 곳으로 조선 중기 문의현의 객사였던 문산관(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9호)을 비롯해 옛 사대부 가옥부터 민가, 주막 등 고건물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또한 장승, 연자방아, 성황당 등 각종 유물과 자료들이 한데 모여 있어 옛 생활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문화재단지에서 벗어나 문의면에 다다르면 청남대 버스 매표소와 마주친다. 대청호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는 청남대는 지난 2003년 일반에 개방된 뒤 지금까지 500만 명의 방문객을 맞은 지역의 명소다. 일반 차량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주차를 해둬야 초소 앞에서 멋쩍게 되돌아오는 낭패를 겪지 않는다. 단체입장객의 경우 청남대 홈페이지(http://chnam.cb21.net/)를 통해 예약을 받는다.

청남대 방문 일정이 없다면 인근 청원 나들목을 통해 대전 방면 등으로 빠져나오며 드라이브를 마무리 하면 된다. 만약 아쉬움이 남는다면 회남대교를 지나 보은·옥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타고 호반 남쪽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특히 괴곡 3거리를 지나 문덕교를 건너 잠시 샛길로 빠지면 나타나는 마동창작마을은 특이한 볼거리로 많은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명소다. 지난 1995년 폐교였던 마동 문의분교를 개조해 만든 전업 작가들의 창작 공간인 마동창작마을은 현재 서양화가 이홍원씨 등 지역예술인 5명이 상주하며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다.

<드라이브 코스>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나들목→대청댐→현암사→문의대교→문의문화재단지→청남대 버스 매표소

△ 청남대 이동시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나들목→대청댐→현암사→문의대교→문의문화재단지→청남대 버스 매표소→괴곡 3거리→신대리(청남대)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사진=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