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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반길) 겨울에도 차마 꽃잎을 떨구지못한 가을꽃의 눈물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1. 1. 6.

[금토일]대청호반길 걷기
겨울에도 차마 꽃잎을 떨구지못한 가을꽃의 눈물
데스크승인 2011.01.07  PDF 지면보기 |  12면 정진영 기자 | crazyturtle@cctoday.co.kr  
   
 
   
 
1990년대 중반에 생산된 오래된 승용차는 눈 내린 산하를 가로지르며 콜록댔다. 차는 노면 위 살얼음을 저단 기어로 겨우 헤쳐 나갔다. 한 겨울 빈산의 애처로운 풍경은 며칠 간 내린 폭설에 경건한 모습으로 거듭나 있었다. 차주(車主) 이형규 기자는 풍경을 향해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그리 길지 않은 유통기한을 내재한 설산(雪山)의 풍경은 혼자 즐기기엔 다소 적적하다. 자주 보아왔던 풍경임에도 동료의 감탄사가 보태진 풍경은 새로웠다.

 

 1. 얼어붙은 이국적인 풍경

 목적지인 찬샘마을로 향하던 자동차는 추동 자연생태공원에서 잠시 멈춰 섰다. 지난 계절 내내 들꽃의 향기와 색으로 들끓었던 공원은 소복이 쌓인 눈과 더불어 고즈넉했다. 공원 내 눈 덮인 풍차와 벤치는 변두리에서 이국을 바라보게 만든다. 평면으로 매끄럽게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몇 달 전 보랏빛 연꽃으로 생글거리던 호수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다. 쌓인 눈 아래 고요하게 얼어붙은 땅이 품고 있을 봄, 여름, 가을 또한 그러했다.

 눈 덮인 울타리를 털어내자 얼어붙어 말라버린 노란 국화 꽃잎 몇 개가 떨어졌다. 지난 가을 이곳에서 '국화 축제'가 열렸음을 상기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워야 할 때 아름다워야 아름답다'는 말장난이 목구멍에서 맴돌아 피식했다. 설원 위로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갯짓하며 고요를 갈랐다. 인적 없는 공원은 그렇게 느린 겨울을 견디며 봄을 예비하고 있었다. 차는 다시 찬샘마을로 향했다.

 

 

 

 

 

 

 2. 느린 길을 품은 고요한 마을


 대청호반길 3코스의 기점인 찬샘마을은 농촌체험마을로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특히 얼마 전 '1박2일' 멤버들이 하룻밤 묵고 간 뒤 마을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며칠간의 폭설 탓에 시내버스마저 막힌 마을은 적막했다.

 지난해 4월, 대전시는 대청호와 인접한 동구와 대덕구 일부 지역에 대전판 '올레길' 대청호반길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이 길은 6개 주요코스 및 11개 세부코스로 조성된 59㎞ 길이의 생태탐방로와 3개 코스로 조성된 26.6㎞ 길이의 자전거 탐방로로 이뤄져 있다. 저 멀리 제주 땅을 순례자처럼 걷는 이들을 부러워했던 지역민들이 하나 둘씩 혹은 무리지어 대청호반길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대청호반길은 빠르게 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아갔다.

 3코스는 2개의 세부코스로 나뉜다. 첫 번째 세부코스는 찬샘마을에서 노고산성을 거쳐 마을회관으로 이어지는 3㎞ 길이의 순환코스로 약 1시간여가량 소요된다. 특히 노고산성은 대청호반길의 대표적인 해맞이 명소로 매년 1월 1일이면 새해의 신령한 기운을 받으려는 방문객들로 부산하다. 또한 코스 중간에 위치한 찬샘정은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 너른 호반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 두 번째 세부코스는 찬샘마을에서 노고산성을 거쳐 성치산성으로 이어지는 3㎞ 길이의 코스로 약 4시간 반가량 소요된다. 성치산성은 청남대가 바라보이는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대청호라는 훌륭한 자연적 인프라에 기대어 조성된 걷기 코스답게 코스의 상당 구간이 호수와 맞닿은 대청호반길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걸음을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호반의 모습은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일 듯 말듯 애태우며 시선을 빼앗는다. 그러나 길은 길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할 뿐 주변 풍경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같은 시각적 효과는 기존의 길에 이정표만을 세우는 등 최소한의 개발을 선택한 까닭이다.

 호반 인근에 자리 잡은 마을과 인접한 코스로 다가갈수록 이러한 배려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곳 마을들은 행정구역상으로만 대전이라는 대도시 품안에 안겨있을 뿐이다. 여전히 오래전 외진 마을의 모습과 삶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서 바뀐 것이라고는 주민들의 나이가 전부다. 오래전 생생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생생하지 않은 지금도 그들만의 삶을 의식처럼 이어가고 있다. 길 위를 걷는 노인들의 발걸음에는 서두름이 없고 경운기는 노인들과 속도를 다투지 않는다. 걷기 코스라기보다는 생활공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마을의 흙길과 농로는 주민들의 느린 삶과 닮아있어 소박하다.

 

 3. 수몰민들의 망향정

 고향은 먼 곳에 있다. 가까운 곳에 있어도 먼 곳에, 먼 곳에 있어도 먼 곳에 있다. 타향에 머물고 있는 한 고향은 물리적 거리에 관계없이 먼 산 너머에 깃든 그리운 작은 마을이다.

 타향살이의 시름이 깊어질 무렵이면 가장 먼저 되살아오는 것은 향수(鄕愁)다. 향수의 증상은 열병과도 같다. 짐작키 힘든 먹먹함이 가슴을 조인다. 먼 곳을 가까이 당겨 보고자하는 환자들의 눈가에 핏발이 선다. 꿈속에선 집 앞 골목길을 헤맨다. 명절 귀향길은 열병을 치료하기 위한 사후약방문일지도 모른다. 황금빛 들녘 없어도 귀향길은 풍요롭다. 고향은 추워도 따뜻하다. 귀향은 다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여행이다.

 인간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은 연어의 경이로운 귀소본능에 다름 아니다. 살아서는 서울 물을 먹고자 하나 죽어서는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소박한 바람 아니던가. 높다란 계단식 어도를 넘지 못해 애를 태우는 연어의 마음과 휴전선을 따라 늘어선 망향정(望鄕亭)에 올라 닿을 수 없는 북녘하늘을 매만지는 실향민의 마음은 등거리다. 그러나 어도가 낮아져도, 통일이 이뤄져도,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수몰민들이다.

 대청호반길 3코스의 첫 번째 세부코스를 1.2㎞ 남짓 걸어 오르면 대청댐 수몰민들의 망향정, 찬샘정이 보인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대청호 물비늘이 겨울바람에 부서져 반짝인다. 눈앞에 호반이 차오르자 수면 위로 섬이 하나둘씩 솟아올라 다도해를 이룬다. 그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는 자리에 찬샘정이 서있다.

 

 

 


 찬샘정에 올라 내륙의 다도해를 바라본다. 이제는 섬으로 불리는 오래전 언덕들… 수면 아래로 실향민 아닌 실향민들의 가없는 그리움이 잠겨있다. 그리움은 섬 하나하나마다 사금파리마냥 흩어져있다. 수몰민들은 이곳에서 사금파리들을 모으다 지쳐가고 사금파리들은 추억돼 흩어져간다. 수몰민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그리움은 정자 옆 시비로 남아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잡는다.

 

 "산도 좋고 물도 좋은 내 고향 냉천 땅에서
 괭이 들고 땅을 파던 그 시절이 그립구나"

 - '추억에 그 세월을' 中

 

 벗겨진 구름 따라 시린 하늘 문이 열린다. 찬바람 속에서 겨울 햇살이 은근한 따스함으로 살갗을 파고든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호반을 향해 늘어선 수많은 무덤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한 무덤 앞의 눈 덮인 조화가 바람에 흔들렸다. 살아서는 되올 수 없는 사랑의 그리움에 사무쳐 호반을 찾아오고, 죽어서는 호반 언덕에 누워 물밑 고향을 향하고…
 사랑은 그리움 향한 미련함의 절정이다.

 

 4. 비경은 관동묘려에

 높은 곳에서 굽어보아야 하는 대청호의 풍경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마냥 달려들기 쉽지 않다. 너른 수면과 사람들 사이에 놓인 사면(斜面)은 유리벽처럼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경계 아닌 경계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높이 올라야만 바라보이는 것을 허락하는 호반은 광활하나 어딘지 모르게 어렵다.

 찬샘정에서 냉천길 자전거 코스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그중 왼쪽으로 뚫린 샛길을 따라 1㎞가량 들어가면 몸을 낮춘 호반의 풍경이 시야로 드나드는 관동묘려다.

 

 

 


 낮게 깔린 호반의 나른한 풍경은 한겨울에도 여전했다. 풍경과 사람들 사이에 놓은 경계는 빈 밭과 허수아비뿐이어서 낮은 수면이 움켜쥘 수 있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갑작스런 불청객의 방문에 놀란 오리 떼들이 허둥지둥 날갯짓하며 일렬로 수면을 갈랐다. 왜가리와 백로 몇 마리가 오리 떼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게으른 날갯짓으로 옆 봉우리로 향했다. 수면 위로 쏟아진 오후의 짧은 햇살이 잔물결 속에서 쪼개져 빛났다. 붉은 기운 감도는 공기 속에서 관동묘려의 겨울 풍경은 수묵담채화다. 사람과 눈높이를 맞춘 호반은 편안하다.

 저마다 기호의 차는 있겠으나, 대청호반 걷기코스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 중 으뜸은 단연 관동묘려다. 동동주 한 사발 생각이 간절했지만 관동묘려의 유일한 음식점 '할먼네집' 대문은 강추위에 자물쇠로 굳게 얼어붙어있었다. 군입을 다시며 봄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관동묘려의 봄은 흩날리는 벚꽃잎으로 가득하니 기다림이 길어도 아쉽지 않다.

 군입은 관동묘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옥천 방아실 회타운에서 다셨다. 겨울철 방아실은 대청호에 기댄 제철 먹을거리로 가득하다. 미나리와 배, 참기름, 초장으로 버무려진 향어회가 입안에서 찰지게 씹힌다. 우러날 대로 우러나 기름 동동 뜬 매운탕 국물이 찬바람 들어간 속을 데운다. 제철 맞은 빙어 튀김의 고소함은 깨가 서말이다. 겨울은 역시 추워야 제 맛이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