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이 빚어낸 걸작이 마이산이라면, 인간이 빚어낸 걸작은 탑사의 돌탑군이다. 이갑룡(1860~1957) 처사가 홀로 30년간 적수공권으로 쌓아올린 80여기의 탑들은 비바람에도 허물어 지지 않는 신묘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정진영 기자
나들목을 벗어나자 거대한 민둥 바위산 둘이 고개를 들었다. 본디 그렇게 생겨먹은 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찾아왔으면서도 그 모습이 참으로 기묘해 시선을 다른 곳에 두기 어려웠다. 보름달이 발걸음을 따르듯, 우뚝 솟은 봉우리는 차창 밖 모든 사물의 배경을 이루며 외지인을 따랐다. 갈필로 헐겁게 그려졌던 2월의 진안은 마이산 두 봉우리에 힘입어 생동하는 풍경으로 거듭났다. 마이산으로 향하는 북부진입로 위에서 고원은 찬바람으로 사람 사는 세상의 것들을 밀어냈다. 오래된 자동차는 풍절음과 온갖 기진한 잡소리로 바람과 겨우 맞섰다. 속도를 더 높이자 잿빛 봉우리가 달려들어 앞 유리를 가득 채웠다. 마이산과 가까워지면 진안도 가까워지고, 마이산과 멀어지면 진안도 멀어진다. 마이산은 은자(隱者)의 고장 진안의 랜드 마크다. 

   
▲ 암마이봉(좌)과 수마이봉(우)의 설경. 진안군청제공

1. 지구가 벌인 대역사

자동차는 북부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야트막한 경사로에 낀 살얼음위에서 바퀴가 헛돌았다. 산 너머 남촌에서 마른 가지 틈새를 비집고 솟아올랐다는 홍매화에 대한 기별은 아직 고원까진 닿지 않은 듯했다. 주차장 직원이 '이렇게 추운 날 뭐 하러 산을 찾았느냐?'는 질문을 담은 눈빛과 함께 주차권을 건넸다. 눈 덮인 주차장은 구획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입춘이후 전국 곳곳에서 얼음들이 가장자리로 물러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얼음은 두껍고 단단했다. 마이산이 전국에서 벚꽃의 개화가 가장 늦는 장소임을 상기했다. 주변 음식점과 매점의 입구 또한 굳게 얼어있었다. 다행히 등산로는 관리된 듯 얼어있지 않아 아이젠을 꺼내야하는 수고로움은 없었다.

매표소를 지나쳐 가파른 나무계단을 10분여 남짓 올라서면 두 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계곡, 천황문에 다다른다. 천황문은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分水嶺)이자 암마이산(673m)과 수마이산(667m)을 가르는 경계다. 북쪽 사면으로 흐르는 빗물은 금강의 원류를, 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빗물은 섬진강의 원류를 이룬다. 계단에선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마이산 두 봉우리는 천황문에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희한한 모습이다. 흙냄새를 풍기지 않는 가파른 절벽은 엉망으로 굳어버린 콘크리트 덩어리를 연상시켰다. 멀리선 예각(銳角)으로 하늘을 치받는 봉우리에선 느낄 수 없는 친근감으로 다가왔던 둥글둥글한 봉우리는 가까이선 이질감으로 낯설었다. 산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구조물에 가까운 모양새다.

수마이산의 가파른 등산로를 100여m가량 따라가면 화엄굴이 나오는데, 여기서 흐르는 석간수가 아들 낳는 특효약이라는 소문이 예부터 파다했다. 그러나 이날 화엄굴로 향하는 등산로는 얼어붙어 쇠사슬로 잠겨 있었다. 수태고지(受胎告知)도 훈풍 부는 날에 있어야 석간수 한 사발을 얻어먹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둘기의 배설물과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이 흘린 촛농으로 오염돼 석간수의 음용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수마이산보다 완만한 경사를 이뤄 한때 등산로를 개방했었던 암마이산은 식생의 훼손을 이유로 지난 2004년 10월부터 외부인을 받지 않고 있다. 암마이산의 등산로는 식생복원사업의 종료시점인 오는 2014년 10월에 재개방될 예정이다. 이래저래 사람의 죄가 크다.

마이산 두 봉우리는 자연이 수천만 년에 걸쳐 이뤄낸 대역사의 흔적이다. 마이산을 둘러싼 역암층의 두께는 2000m이상인데, 이는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진안고원은 거대한 호수의 바닥을, 마이산은 호수와 가까운 곳에서 선상지(扇狀地)를 이뤘다고 한다. 온난 건조한 백악기를 살았던 한반도의 공룡들은 이곳 호수에 옹기종기 모여 마른 입을 적셨을 터이다. 오랜 가뭄의 와중에도 간헐적으로 대홍수가 일어나곤 했는데, 이때 먼 곳에서 휩쓸려온 수많은 자갈과 모래들이 호수 바닥에서 역암 퇴적층을 형성했다. 퇴적층은 인장력을 받아 멀어진 두 지괴 사이에 형성된 계곡 속으로 함몰돼 부채꼴 모양으로 쌓였다. 이 같은 과정은 헤아리기 어려운 세월동안 지속됐고, 침강한 퇴적층은 지하 7000~8000m 부근에서 열과 압력을 받아 고화(固化)되는 양생(養生) 과정을 거쳤다.

양생을 마친 퇴적층은 압축력을 받은 지괴의 재결합에 힘입어 지면위로 우뚝 솟았다. 지금의 마이산 두 봉우리는 풍화작용에 따른 차별침식으로 깨어지고 남은 역암 퇴적층의 잔존물이다. 이 같은 침식작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절벽 곳곳에 곰보처럼 패인 자연동굴, 타포니(tafone)가 그 증거다. 역암층과 더불어 세계적으로도 가장 거대한 규모의 풍화혈(風化穴)을 형성하고 있는 마이산은 전 세계 지질학자들의 단골배움터다.

마이산은 인류의 탄생 때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지층의 형성 과정을 헤아릴 수 없었던 옛 사람들에게 있어 뜬금없이 우뚝 솟은 마이산은 오랜 세월동안 신비로운 장소였을 터이다. 그 신령한 모습에 이끌려 예부터 이곳에선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32권 잡지(雜志) 제1(第一) 제사(祭祀)편은 서다산(西多山·마이산의 옛 이름)에서 3산 5악 이하 명산대천에서 지내던 제사 중 하나인 소사(小祀)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10월 11일이면 수마이봉 절벽 아래 은수사에 마련된 제단에선 산신제가 열려 오래된 신을 모셔와 음복을 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한다.


2. 은수사, 전설이 사실보다 무거운
   
▲ 돌탑군을 조성한 석정 이갑룡처사 의 석상


천황문을 지나 가파른 나무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면 태고종찰 은수사(銀水寺)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마신 물이 은(銀)과 같이 맑고 깨끗하다'고 말하였다는데서 절 이름이 유래한다는데 분명치 않다. 조선 초기에는 상원사(上院寺), 중기에는 정명암(正明庵)이라 불리다가 1919년 중창돼 1925년부터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는데 이 역시 분명치 않고, 창건 주체와 시기 또한 전해지지 않아 연혁을 알 길이 없다.

역사적 공백의 많음은 끼어들 허구와 상상력의 여지가 많음을 의미하는 데, 은수사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대부분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다. 전설에 따르면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이산에 들른 이성계는 꿈속에서 산신으로부터 "이 자(尺)로 삼한강토를 헤아리라"는 계시와 함께 금척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경내에 마련된 태극전에는 몽금척도(夢金尺圖衾·이성계가 금척을 받는 그림)와 복원된 금척이 전시돼있으나 역사적 가치는 의문부호다. 게다가 금척은 자보다 칼에 가까운 모양새다. 절 앞마당에는 오래된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 한 그루가 자라는 데, 이 또한 이성계가 심었다하나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같은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배경 사이에 뒤섞여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13년(1413년) 10월 12일, 임금이 이곳에서 직접 천제를 주관하고, 산에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태조 2년(1393) 정도전은 조선의 창업을 기리는 노래 몽금척(夢金尺)을 지었다. 노래를 춤으로 형상화한 몽금척무(夢金尺舞)는 궁중의 정재(呈才·대궐 안의 잔치 때에 벌이던 춤과 노래)중 하나였다. 지금도 진안군은 태종이 천제를 주관했던 10월 12일을 '진안 군민의 날'로 정해 매년 몽금척무를 공연한다.

 수마이산이 절 뒤편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코끼리의 앞모습을 닮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모양이다. 기다란 코에 가느다란 눈까지 새겨진 것이 영락없이 웃고 있는 코끼리다. 마이산은 그 자체보다 풍경의 일부 일 때 아름다운 산임을 실감한다. 그런데 은수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보다는 그 재미가 덜하다. 고작 몇 백 년 전에 이성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은 전설로 남아 아득하고 희미한데, 수천만 년에 걸쳐 벌어졌던 퇴적과 융기, 침식과정은 마치 눈앞에서 벌어진 일 인양 생생하니 말이다. 너무 많이 알면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아 재미없는 법이다. 청실배나무는 역(逆)고드름으로 유명한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부처님의 영험함 내지는 신령한 산 기운의 발로로 여기고 있다. 이 역시 과학적인 원리가 밝혀져 재현까지 성공했다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다. 마이산에서도 동료의 스마트폰 3G기능은 무리 없이 작동됐다. 스마트폰의 작은 액정화면을 통해 연결된 인터넷은 직접 보고 알게 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정리된 정보로 알려줬다. 가끔 신령한 것은 신령한대로 두는 게 옳아 보인다. 어차피 알 사람들은 알아서 다 아는 세상이다.

   
▲ 마이산 탑사에서 발견한 역고드름

 

 

3. 탑사, 사실이 전설보다 무거운 곳

은수사에서 아래로 300여m가량 내려가면 마이산의 명물 탑사(塔寺)다. 돌계단을 내려오자 독경소리와 더불어 수많은 돌탑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참으로 성의 없어 보이는 절 이름이나 이를 대체할만한 이름도 찾기 어려울 듯싶다. 원추형 탑부터 기둥형 탑까지 약 80여 기의 다양한 모양의 탑이 세워져있는데, 그 규모 또한 만만치 않아 높이만 15m에 가까운 탑도 있다. 살다 살다 이런 절은 처음 본다. 뿐만 아니라 이 탑들은 폭풍우와 바람에도 끄떡없기로도 유명한데, 그 어떤 접착제를 쓴 흔적도 없다. 더욱 기함할 일은 이 탑들이 모두 100년 전 한 사람의 적수공권의 결과물이란 '사실'이다.

구한말 암울했던 세상을 등진 채 솔잎으로 연명하며 도를 닦던 이갑룡(1860~1957) 처사는 1885년 26세의 나이에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는다. 이후 그는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그 돌을 쌓았다. 그는 인근 30리 안팎에서 조달한 돌들로 팔진도법(八陣圖法)에 따라 기단부를 축조했고, 축지법을 이용해 각처의 명산에서 조달한 돌들에 기를 담아 상단부를 쌓았다. 음의 날에는 양의 돌을 쌓았고, 양의 날에는 음의 돌을 쌓았는데, 그 시간은 만물이 시작되는 시간, 자시(子時)였다. 그렇게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번뇌를 씻고자 30년 동안 108개의 탑을 쌓았다. 이처럼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를 뒤로하고, 1957년 이갑룡 처사는 한생을 맑게 살다 98세를 일기로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 돌에도 암수의 조화가 있는지, 수령님만 쓰신다는 축지법이 존재하는지, 탑을 쌓은 뒤 억조창생이 편안해졌는지 결론내릴 수 없어 후인들은 그저 탑의 신묘함 앞에 감탄할 뿐이다. 현실로 증험되고 머리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전설이어서 1년에 약 120여만 명의 방문객들이 찾아와 탑에 얽힌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인다.

은수사와 마찬가지로 탑사 역시 역고드름으로 유명한데, 운이 좋아 섬진강의 발원지(?) 용궁위에 놓여있던 파란 바가지에서 역고드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역고드름이 솟아있던 바가지는 촌스러운 색깔에 이까지 빠져 볼품없었다. 신묘함을 반감시키는 옥에 티가 아쉬워 곳곳에 흩어진 제단 위에 놓인 유기그릇들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의 역고드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기적은 낮은 곳에 임해야 기적이라던가. 낮은 곳의 기적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사람들은 부스러기 겨울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

산신각에 올라서자 뒤편 가파른 절벽이 부서지는 소리로 울었다. 얼음 절벽이 2월 햇살의 미열에 끈끈한 수액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낡은 풍경이 벗겨지는 소리가 청량하다. 저 아래선 벚나무들이 새순을 돋아내며 싱그러운 향기를 열 채비를 하고 있다. 은수사의 늙은 청실배나무도 뿌리 뒤틀렸던 아픔을 딛고 겨우내 참았던 숨을 내쉬고 있을 터이다. 늙은 나무나 젊은 나무나 그네들이 뿜어내는 꽃은 언제나 어리고 화사하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