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팔경 중의 하나인 한산도 제승당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다. 한산도는 통영에서 바라보았을 때 미륵도 왼쪽에 있는 자그마한 섬이지만 한산면의 주도이자 한려해상공원의 출발점이다. 한려수도의 '한려'도 한산도와 여수의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통영=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지난 밤 거제에서 통영으로 진입해 활어시장서 들이부었던 소주는 다음날 정오 무렵까지 기자들의 심신을 움켜쥐었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햇빛이 여관방 안으로 쏟아졌다. 속옷 바람으로 침대와 방바닥 곳곳에 널브러져있던 기자들 주위로 각자의 여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햇빛은 땀으로 적나라하게 번들거리는 얼굴과 미역처럼 눌어붙은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였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먼데 몸은 술에 절어 만신창이니 이래저래 골치다. 술은 역시 마실 때만 좋다. 그 사실을 몸으로 십 수 년을 익혀놓고도 며칠만 지나면 술잔이 손에 쥐어져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야말로 즐거움이 각별하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어리석음과 난감함 사이에서 마음은 결국 후자로 기운다. 아마도 예향(藝鄕) 통영서 나고 자란 수많은 예인들의 마음 또한 그랬을 터이다.

1. 예향(藝鄕) 통영

통영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충청·전라·경상도 3도 수군을 총괄했던 통제영으로부터 유래한다. 통제영은 본래 거제도 경상우수영 자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종결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된다. 이후 1895년 폐영 전까지 통영은 3도 수군의 중심 기지였다. 300년의 세월 동안 배출된 통제사는 이순신 이래 총 208명에 달하는데, 이중 12명이 이순신의 후손이라고 한다. 보은인사의 '좋은 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지에서 기술자들을 통제영으로 불러 들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배곯을 일 없는 온화한 땅 통영 땅에 뿌리내렸다. 통영 출신인 故 박경리 작가는 "충무공이 소집한 조선 기예(技藝)의 DNA가 통영 사람들에게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고향을 자랑했다. 김상옥, 김춘수, 유치진,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과연 그 자랑은 허언이 아니어서, 통영은 걸출한 예인들을 다른 고장에 비해 유독 많이 배출해냈다. 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통영으로 찾아들어와 드난살이를 했던 예인들도 조선 기예(技藝)의 DNA의 수혜자였다. 화가 이중섭은 1953년 부산 피란 시절 아내를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통영서 6개월간 체류하며 자신의 대표작 '황소'를 그렸다. 유치환을 따라 미륵산에 올랐던 시인 정지용은 기행문 '통영5'에서 "나는 통영 풍경을 문필로 묘사할 능력 없다"고 고백했다.

지난밤 소주로 미처 채워지지 않는 허허로움을 희미한 불빛에 기대어 맥주로 달랬던 강구안 포구엔 바다와 하늘 빛깔이 짙었다. 때 이른 봄볕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밀어내는 강구안의 풍경은 색채로 강렬했다. 잔물결로 이는 파도사이로 파고들었던 바람이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싣고 와 코끝에 닿았다. 도심에 둘러싸인 내해의 모습이 이럴진대 미륵산 정상에서 부감하는 통영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러나 기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한때 문학청년이었고 지금도 문학청년이고 싶은 기자들은 청마문학관으로 향했다.
 

   
▲ 복원된 청마 유치환의 생가.

2.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강구안에서 멀지 않은 정량동 망일봉 언덕에 이르면 탈이념화된 강인한 어조로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의 흔적과 만날 수 있다. 지난 2000년 2월, 통영시가 건립한 청마문학관은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있는 각종 유품 100여 점과 평론·서적·논문 등 문헌자료 3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위쪽엔 청마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본래의 생가터는 문학관에서 1.7㎞가량 떨어진 태평동 번화가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포장도로화 돼 흔적도 없다.

청마의 생명을 향한 열정은 결국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졌는데, 그 사랑은 장장 20여년에 걸쳐 쓰인 5000여 통의 연서(戀書)로 남아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깃발로 펄럭이고 있다. 그러나 유부남과 청상과부 사이에 놓인 사회적 장벽은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완강했다. 그들의 사랑은 이생에는 닿지 않을 금지된 사랑임과 동시에 낭만적인 플라토닉 러브였기에 더욱 애절했다. 동인지 죽순(竹筍)의 회원이자 같은 학교(통영여고)의 동료교사로서의 인연으로 시작된 청마의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1916~1976)를 향한 순애보는 1967년 2월 1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청마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서서 정운에게 연서를 썼다. 정운은 통영중앙우체국 건너편 이층집에 살았다. 함께할 수 없는 인연의 운명 앞에서 우체국과 건너편 이층집 사이의 거리는 가까우나 멀었다. 정운이 사회적 금기라는 자기 검열로 채운 마음의 빗장 또한 단단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作 '그리움'

정운의 마음이 열린 것은 꼬박 3년이 흐른 뒤였다. 참으로 모질었던 외사랑은 그렇게 끝났지만 함께할 수 없는 현실은 여전했다. 편지쓰기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청마가 생전에 보낸 5000여 통의 연서와 시는 사후 정운에 의해 200통으로 추려져 단행본으로 엮였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이름으로 엮인 유치환의 흔적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나 인세를 둘러싸고 청마의 유족과 정운 사이에 잡음이 일었다. 정운은 추잡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인세를 현대시학사의 시작품상 기금으로 쾌척했다. 이후 인세는 정운시조문학상 기금의 밑거름 역할을 하고 있다. 청마의 사후 거처를 부산서 서울로 옮긴 정운은 1976년 3월 6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청마가 살아서 누렸던 시간만큼 세상에 머물렀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 이영도 作 '탑3'
 

3. 들리지 않는 사랑노래

1597년 9월 4일, '수군(水軍) 전멸' 보고를 받은 선조는 원균 막하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를 내렸다. 교서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내용과 더불어 모친상 중에 있는 이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야 하는 미안함 등이 담겨있었다. 불과 5개월 전 조정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죽이려했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의 휘하엔 단 한 척의 전함도 없었다. 이순신이 임진년 이후 한산 통제영에서 3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확보했던 군비는 칠천량 앞바다에 으깨져 있었다. 임명 교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순신은 기민하게 각처를 돌며 흩어진 병사들과 군량, 무기를 모았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과 더불어 2척을 더 수습한 이순신은 황망함 속에서 겨우겨우 수군의 모양새를 잡아나가며 기진맥진했다.

그러나 임금의 몰염치는 계속됐다. 여전히 질시와 의심의 허깨비에 사로잡혀있던 임금은 이순신에게 '수군전폐령'을 내렸다. 지금의 조선 수군은 수군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규모이니 육군에 통합시킨다는 어명이었다. 임금은 왜군도 이순신도 두려워했다. 이순신은 끊임없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적을 감당해야 하는 동시에 내부의 적들을 방어해야 했다. 외부의 적들과는 달리 내부의 적들은 베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능하고 옹졸한 조정을 향한 치 떨리는 노여움과 서글픔 속에서 이순신은 단호한 장계로 어명을 일축시켰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나이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 1척의 전선을 더 수습한 이순신은 1597년 10월 25일 명량에서 일자진으로 일본 수군 133척을 궤멸시키며 자신이 장계에 토해낸 약속을 지키고 제해권을 되찾는다.

한산도로 향하는 여객선 위에서 오래전 이순신이 저 멀리 진도 울돌목에서 중과부적의 절망 속에 치렀을 명량해전이 안쓰러웠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날 한산대첩의 승전지는 무기력하게 무너진 조선 수군의 무덤, 칠천량 앞바다와도 멀지 않다. 승리의 함성 속에서 패배의 아픔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거북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한가로이 등대 뒤편 바다를 가르는 어선을 바라보며 한산도 서쪽 멀리 노량 앞바다에서 펼쳐졌을 마지막 전투를 생각했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놓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 김훈 作 '칼의 노래' 서문 中

소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을 박제된 영웅에서 '절망을 긍정했던 고독한 인물'의 이미지로 탈바꿈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살게 만들었다는데서 문학적 의의를 가진다. 400여 년의 시간을 격해있다 되살아온 번민의 기록은 '성웅'의 그림자 속에서 거세됐던 이순신의 '인간'의 면모를 되살리며 많은 이들을 눈물겹게 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배우 김명민이 보여준 이순신의 모습은 '인간 이순신'의 절정이었다. 우리는 이제 승리의 영광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이순신의 절망과 고뇌를 읽어내며 함께 쓸쓸할 수 있다. 더불어 이순신의 전사가 순교에 가까웠다는 의혹은 더욱 짙어졌다.

제승당(制勝堂) 수루(戍樓)에 서서 바다를 굽어보았다. 숱한 번민 속에서 이순신은 전란 종결 후 임금의 칼이 다시 자신에게 향하리란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다시 피로 물들지도 모를 조선 땅에 대해 번민하고 두려워했을 터이다. 김덕령처럼 맞아죽는 것도, 곽재우처럼 은둔하는 삶도 원하지 않았던 이순신은 자신의 마지막 소임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식했으리란 의혹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 김훈 作 '칼의 노래' 中

통영=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 충무공이 족구의 존망을 걱정하며 적진을 살폈던 수루는 이제 봄볕 머금은 쪽빛 바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한 여행객들의 차지다. 통영=정진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