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멀리 남쪽 바다와 가까운 곳에선 이른 봄을 자축하는 화려한 축제가 한창이다. 입춘을 넘기자마자 서둘러 개화하는 거제시 구조라초등학교(폐교)의 늙은 매화나무 네 그루는 올해도 어김없이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빈 교정을 채우고 있었다. 시린 하늘을 걷어내는 따사로운 햇살아래서 거짓말처럼 펼쳐지는 때 이른 봄 축제란 얼마나 소박하고 복된 일인가. 멀리선 그윽했던 매향(梅香)이 가까이서 강렬하게 휘발하며 후각을 마비시키는 사태란 얼마나 황홀하고 아찔한 일인가. 거제=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저 멀리 남쪽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에게 새 봄을 안겨주고 있다는 늙은 매화나무에 대한 기별에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렜다. 기별은 사진과 더불어 인터넷 세상에 호외로 뿌려졌는데, 사진 속에서 계절을 거슬러 군집으로 피어난 매화는 폐교의 낮은 하늘 아래서 구름처럼 몽롱하게 떠돌고 있었다. 보고 또 봐도 믿기지 않는 사진 속 풍경은 우수(雨水)를 떠나보내고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봄에 목말라하던 이들을 기함케 했다.

사진 속 남도의 매화는 수줍게 한 두 송이로 솟아오른 홍매화나 잔설을 비집고 겨우 피어난 복수초에게선 느낄 수 없는 당당함으로 겨울을 깨우고 있었다. 몇 달동안 아껴 모은 쌈짓돈을 헤아려보니 한번 정도 남도를 유람하기에 모자라진 않을 듯싶었다. 마음이 계절을 앞선 이들이 주말을 반납했다. 나재필 논설위원을 필두로 노진호·정진영 기자는 마중물 마냥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1. 계절을 거스르는 매혹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로부터 충청도 사람 셋을 건네받은 14번 국도는 굴곡진 해안선 곳곳을 자랑스레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였다. 그러나 외지인들을 국도 위에 멈춰 세운 것은 동백꽃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동백나무들은 저마다 짙은 초록 사이로 붉은 꽃 몇 송이를 내보이며 겨우내 길었던 시간을 열어젖혔다. 꽃들은 대부분 봉오리로 맺혀 있었는데, 계절을 거스르는 매혹 속에서 수줍게 꽃잎을 연 동백꽃은 보석처럼 햇살을 튕겨냈다. 아스팔트 위로 스미는 햇살은 온기로 일렁였다. 꽃비로 흩날리고 있을 매화나무를 목도하고픈 마음은 도로 위에서 더욱 달았다. 자동차는 폐교된 구조라초등학교를 향해 다시 내달렸다.

계절을 거스르는 것은 동백꽃만이 아니었다. 잠시 길을 묻고자 멈춰선 곳과 인접한 몽돌해안에서 우린 자맥질하던 어린 아이 하나를 만났다. 이름을 묻자 아이는 씩씩한 목소리로 "김도균"이라고 외쳤다. 나이를 묻자 옆에서 함께 자맥질하던 외삼촌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대신 대답했다. 춥지 않느냐는 물음에 아이는 자랑스럽게 "추운데 별로 춥지 않다"고 난해하게 답했지만, 외삼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영국 유학 중인 도균이의 외삼촌은 모레 다시 출국해야 한다. 외삼촌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는 3학년이다. 출국하면 오래 못 볼 외조카의 추억 만들기를 위해 기꺼이 찬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 외삼촌의 마음 씀씀이가 따사로웠다. 그런 외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외삼촌 손을 붙들고 자맥질하며 자지러졌다.

자동차로 되돌아오는 길에서 예상치 못한 봄의 전령이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햇살과 사면(斜面)으로 마주치는 낮은 곳에 하늘 빛깔 개불알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개불알꽃의 남세스러운 이름은 수캐 ‘뒷구녕’ 아래에서 달랑거리는 '불알'을 닮은 열매모양에서 유래한다. 개불알꽃은 반가이 봄소식을 전해주는 꽃이라 해 '봄까치꽃'으로도 불리는데, 새끼 손톱만한 귀여운 녀석에게 온당한 이름은 아무래도 후자인 듯싶다. 서양 사람들도 녀석의 어여쁨을 아는지 'bird's eye'(새의 눈)이라고 부른단다. 우리도 어지간하면 '개불알' 대신 '봄까치'로 바꿔 불렀으면 좋겠다.

 

     
▲ 동백꽃(좌), 매화

봄의 전령은 봄까치꽃만이 아니었다. 봄까치꽃 주변으로 수많은 작은 별들이 여린 초록 위에 흩어져있었다. 개망초만큼이나 흔한 '국민잡초' 쇠별꽃이다. 쇠별꽃은 봄·여름에 개화하나, 대개 잡초로 불리는 것들이 그러하듯, 가을 심지어 초겨울에도 개화하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척박한 땅을 견뎌낸다. 냉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 좁쌀만 한 하얀 꽃을 잔망스레 피우고 있었다. 전날 마신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뿌리 속 깊숙이 흙냄새로 향긋한 냉이된장국 생각이 간절했다. 이제 곧 봄나들이서 직접 캐온 냉이로 끓여낸 된장국이 가가호호 식탁마다 한두 번씩은 오르내릴 터이다. 거기에 뽀얀 바지락 국물과 속살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변을 오가면서도 개불알꽃도, 쇠별꽃도, 냉이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땅에 들러붙어 깍깍대는 하늘색 봄까치도, 그 주변에서 반짝이는 작고 하얀 별들도, 애정의 깊이만큼 보이는 들리는 법이다. 무심코 지나쳐버리기엔 너무도 가슴 찡하게 아름다운 것들 아닌가. 사람 사는 언저리 낮은 곳에 돋아났다는 이유로 녀석들을 모두 잡초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순간, 우린 수많은 삶의 소소한 재미를 잃게 된다.

자동차는 폐교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계절을 거스르는 매혹의 절정을 폐교와 인접한 모래해변에서 만났다. 해변에선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 예닐곱이 수영복 하의만 걸친 채 공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최소한 서너 달은 족히 기다려야 볼 수 있음직한 광경 앞에서 우린 할 말을 잊은 채 그네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차창 밖으로부터 밀려드는 바람에 온기가 짙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헐벗은 학생들의 함성은 참으로 신명났다.

 

   
▲ 가깝지만 먼 → 멀지만 가까운 ‘거제-부산’ 지난해 12월13일, 거제와 부산을 잇는 거가대교가 착공 6년 만에 개통됐다.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에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송동 가덕도를 잇는 거가대교는 총길이 8.2㎞의 왕복 4차선 도로로 2개의 사장교와 1개의 해저 침매터널로 나뉘어져있다.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거제와 부산 간 거리는 140㎞에서 60㎞로 줄어들었고, 왕복시간은 2시간 1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됐다. 사진은 거제 장목면에서 바라본 거가대교 사장교 구간. 거제=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2. 아름다움은 결국 존재한다

녹슨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교정 안에서 커다란 매화나무 네 그루가 흐드러지게 꽃구름을 피워 올렸다. 십 수 년 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긴 고요한 교정은 이제 전국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이 지긋한 매화나무들의 사랑방이다. 개화의 절정에 치달아 있던 매화나무는 훈풍을 만나 교정 여기저기에 꽃비를 뿌려댔다. 겨우내 지난 계절 모아둔 꿀과 꽃가루로 연명하느라 주렸던 벌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바쁘게 꽃잎 사이를 헤집었다. 거짓말처럼 펼쳐진 때 이른 봄 축제 앞에서 속절없이 심신을 무장해제당하고만 우린 우와! 우와! 탄성을 내질렀다. 접사(接寫)를 위해 매화 가까이로 얼굴과 카메라를 들이밀자, 멀리선 그윽했던 매향(梅香)이 코끝에서 강렬하게 휘발하며 후각을 마비시켰다. 정신 아득해지는 아찔한 향기 속에서, 수많은 꽃잎들이 벌들의 날갯짓에 포개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흩날렸다.

폐교 옆 경로당 안에선 매화나무만큼이나 오래된 사람들 여럿이 모여 앉아 두런거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매화나무에 대해 묻자 두런거림은 수런거림으로 뒤바뀌었다. 수런거림 속에서 매화나무의 수령(樹齡)은 환갑에서 이갑자(二甲子) 사이를 널뛰기했고, 서로 다른 기억들은 시래기처럼 엮여 남도의 방언으로 쏟아졌다. 꺼내든 기억의 깊이와 넓이는 저마다 달랐지만, 일제 때부터 매화나무가 존재했었고 그때부터 꽃을 피운 모습을 봤다는 의견만큼은 대체로 일치했다. 그에 따르면 매화나무의 수령은 최소 100년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엔 거제 사람들조차도 잘 몰랐다던 구조라초등학교의 매화나무는 몇 년 전 언론에 소개된 뒤부터 매년 이맘때면 사진 모델로 바쁘단다. 그러나 저렇게 만개해있어도 비바람 한 번 과하게 불면 하룻밤 사이에 가지가 텅 비어 버린단다. 우린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기를 운 좋게 잘 찾아온 편이었다.

경로당 담장 아래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두세 달 뒤에야 노란 꽃을 피울 방가지똥이 어린 봉오리를 살짝 내밀고 있었다. 앙다문 봉오리 사이로 살짝 비치는 노란 빛깔이 앙증맞아 쉽게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복수초도 산수유도 개나리도 아닌 노란 빛깔을 예상치 못한 계절에 마주친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바람이 분다. 햇살 받아 환한 꽃잎들이 신기루처럼 교정에 흩날리며 반짝인다. 아름다움은 작고 희미해도 버려질 수 없고 결국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저 교정 한가운데 어지럽게 널린 서바이벌 게임장이 장애물마냥 뜬금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 이르면 4월에나 꽃피는 방가지똥이 앙다문 봉오리 사이로 노란 빛깔을 드러냈다
   
▲ 하얀 쇠별꽃과 파란 개불알꽃이 봄보다 빨리 찾아와 둥지를 틀었다
   

▲ 봄의 전령 냉이도 좁쌀만한 꽃을 산망스레 피워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