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태백산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영봉의 천제단으로 향하는 길. 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한겨울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각별하다. 텅 비어서 차가웠던 세상이 밤새 말도 없이 설원으로 뒤바뀌는 거짓말 같은 사태 앞에서 여수(旅愁)를 견뎌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눈 내린 다음날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높은 곳은 수많은 발자국 소리로 아수라장이다. 풍경의 아름다움은 흔치 않은 장소일수록 각별하게 느껴지는 법인데, 열차로 수 시간을 달려 도계(道界)를 넘고 또 넘어야 닿는 눈 덮인 태백산은 한겨울 각별함의 절정이다.


 1. 설국(雪國)

   
 

아침 7시 30분, 새벽 어스름이 갈무리되기도 전에 태백산 눈꽃열차는 대전역을 출발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구제역 때문에 태백산 눈꽃축제 주요 행사들이 취소됐음에도 불구하고, 객실은 설국(雪國)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려는 당일치기 여행객들로 부산했다. 기분에 취한 사람들 몇몇이 때 이른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상을 밀쳐내고 마음 놓고 휴가 한 번 떠나기 힘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도계(道界)를 넘는 일은 국경(國境)을 넘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사업이다.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기에 술기운에 기댄 때 이른 호기를 탓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가는 대화들이 흐린 플라스틱 술잔 위에서 찰랑거리는 동안, 조치원을 경유한 열차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충북선을 따라 일출을 향해 내달렸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짙푸른 공기가 일출에 밀려 벗겨지자, 가려져있던 산하가 은색으로 반짝였다. 조그마한 역사(驛舍), 발자국 흔적 없는 눈 덮인 빈 들녘… 오래된 풍경들을 간직한 충북선 주변의 풍경은 적요했다. 오송, 오근장, 증평, 음성, 주덕, 충주역 등을 차례로 지나친 무궁화호 열차는 남한강 줄기를 건너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를 외쳤던 진소철교를 외줄타기 하듯 지나 제천역에서 태백선으로 갈아탔다. 철로를 갈아탄 열차는 태백을 향해 본격적으로 해발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 中>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作)의 첫 문장은 '칼의 노래'(김훈 作)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만나기전까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소설의 도입부였었다. '설국'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오래전에도, 이해하나 납득하지 못하는 지금도, 이 소설의 첫 문장만큼 압축적으로 배경을 아름답게 그려냈던 소설은 기억에 없다. 습관처럼 해마다 겨울이면 '설국'의 첫 문장은 긴 터널을 통과해 눈발을 가르며 니가타(新潟)현으로 들어서는 낡은 열차의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머릿속에서 각색된 '설국'의 처연한 아름다움의 잔영을 지우기엔 어려웠지만, 객실 바깥의 설경은 '설국'이라고 부르기엔 조금도 부끄러움 없는 풍경들이었다. 열차가 하늘에 가까워지자 세상은 신령한 기운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무인지경의 세상 속에서 눈꽃들은 수종(樹種)을 가리지 않고 피어났다. 한 때 대처로 향하는 석탄화물열차들의 행렬로 바빴던 검은 도시 태백은 이제 겨울이면 관광열차로 대처의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대한민국의 '설국'이다.


 

   
▲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朱木)의 수령은 많게는 수백 년에 달한다. 줄기와 가지마다 강인한 굴곡을 드러내는 주목은 죽어서도 이 같은 모습으로 긴 세월을 버틴다고 한다. 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2. 눈이 와야 사는 고장

열차는 4시간 넘게 달려 점심 무렵에야 태백에 도착했다. 눈이 그친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태백역 주변은 여전히 '설국'의 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태백은 눈과 친해 한 번 눈이 내리면 쉬이 녹지 않는 고장이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원지대로 이뤄져 있는 태백은 하얗게 덮인 눈 때문에 시가지와 외곽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역사 앞에는 태백산 행 관광버스들이 여러 대 늘어서 있었다. 관광버스들은 차례로 열차에서 하차한 승객들을 싣고 외곽으로 향했다. 열차 객실의 창문으로 비치는 설경은 넓은 캔버스 위의 풍경화를 감상하듯 관조하는 즐거움을 품고 있지만,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설경은 아기자기한 맛을 품고 있다. 모든 설경은 처음 보는 설경이다. 설경은 원근에 따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경이롭다. 산이 아니어도 태백의 설경은 어느 곳에서나 다양한 표정으로 아름다웠다.

눈은 태백의 밥줄이자 명줄이다. 지난 2009년 태백은 심각한 식수대란으로 고초를 겪었다. 극심한 겨울가뭄이 원인이었다. 두 달 넘게 제한급수가 이뤄졌고, 시민들은 마른 황사 먼지를 씹으며 하염없이 봄비를 기다렸다. 전국 각지로부터 온정의 손길이 닿았고, 군 병력까지 동원돼 급수지원에 나섰지만 해갈은 쉽지 않았다. 눈의 고장 태백은 눈이 많이 내려야 관광객도 오고 먹을 물도 생긴다. 안타깝게도 태백의 올 겨울 강수량은 평년 수준을 훨씬 밑돌고 있는 상황이다. 같은 도계에 속한 속초는 겨울 가뭄과 상수원 결빙을 이유로 지난달 31일부터 제한급수에 들어갔다. 가뭄에 구제역까지 겹친 태백은 올 겨울 이래저래 마른 침만 삼키고 있다.

 

   
▲ 강원도 태백산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영봉의 천제단. 우희철 기자

 3. 하늘 가는 길

버스는 태백산의 북쪽에 위치한 유일사 매표소에서 멈춰 섰다. 등산객들은 대개 유일사 매표소를 기점으로 태백산 정상 장군봉과 천제단에 오른 뒤 반재를 거쳐 당골광장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산행을 한다. 높은 해발고도(1567m)에도 불구하고 산세가 완만히 흐르는데다, 기점인 유일사 매표소의 해발고도(880m) 또한 높아 체력적 부담이 적어 가족단위 등산객들에게 인기 코스다. 이 코스는 유일사 매표소에서 정상까지 오르막 4㎞, 정상에서 당골광장까지 내리막 4.4㎞ 총 8.4㎞ 가량 이어지며, 산행시간은 약 4~5시간가량 소요된다. 등산 전 아이젠(Eisen) 착용은 필수다. 산세가 완만하다고는 하나 쌓인 눈이 많아 미끄러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이젠은 매표소 부근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가격은 7000원부터 시작하는데. 가장 저렴한 아이젠을 구입해도 산행에는 별 무리가 없다.

태백산 등산로에 쌓인 눈은 고운 입자로 흩날렸다. 등산로는 발자국 대신 아이젠 자국들로 어지러웠다. 고운 눈 입자로 층층이 쌓인 등산로는 어수선한 발자국들을 바람으로 지우며 매순간 신생의 길로 거듭났다. 아이젠 두 짝에 무게를 실은 몸은 발자국 대신 앞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사면에 붙어 뽀드득 소리를 내며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갔다.

사면에 적응한 몸이 숨을 돌리자 기이한 모습의 거대한 나무줄기들이 눈에 든다. 오래전에 말라 죽은 듯 맨 가지와 기둥을 고스란히 드러낸 나목(裸木)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朱木)이다. 유일사에서 천제단으로 향하는 등산로 주변은 대한민국의 대표 주목 군락지다. 수령(樹齡)은 적게는 수십 년에서 많게는 수백 년에 달한다. 건장한 사내의 허벅지처럼 줄기와 가지마다 강인한 굴곡을 드러내는 주목은 죽어서도 이 같은 모습으로 긴 세월을 버틴다고 한다. 거리에서 흔히 접하는 원예종 황금주목에서 느낄 수 없는 경이로운 강인함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대한 주목은 자의식으로 가득한 얼굴빛 붉은 장년의 사내처럼 완고해보였다. 주목은 저마다 빈 가지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먼데서 온 등산객들을 맞았다.

 

   
▲ 태백석탄박물관

 4. 영산회상(靈山‘回想’)

일제 때 지질학적 분류에 따른 산맥개념이 도입되기 전, 우리네 전통적 지리인식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입각해 있었다. 옛사람들은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원리에 따라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고, 이를 백두대간이라고 일컬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은 저서 산경표(山徑表)에서 분수계를 따라 대간과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이 땅을 구분했다. 언어와 풍속, 기후와 생활습관이 분수계를 따라 나뉘었고, 이는 자연스레 지역의 구분으로 이어졌다. 태백산은 그러한 백두대간의 중심이자 물의 중심이다. 한강과 낙동강, 오십천은 태백산 자락에서 발원해 각각 서해와 남해, 동해와 만난다. 태백산(1564m)이 설악산(1708m)이나 가까운 함백산(1573m)보다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영산(靈山)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상을 향한 능선을 따라 좌우로 늘어선 주목들에는 산허리에서 만난 나무들과 달리 예사롭지 않은 위엄이 서려있었다. 준비할 틈도 없이 거대한 장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백산의 정상은 인계(人界)와 선계(仙界)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다.

태백산 정상에는 천왕단과 장군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고 일컫는다. 그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제단은 천왕단인데 장군봉에서 300m쯤 떨어진 영봉(1560m)에 자리 잡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일성왕 5년(서기 138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逸聖尼師今 五年十月 北巡親祀太白山)'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태백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산(靈山)으로 숭배 받았던 듯하다. 제단을 세운 주체와 세워진 시기는 미상이나 사실은 늘 기록을 앞서는 만큼 상고시대부터 이곳은 천제를 지냈던 장소일 터이다. 이 같은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개천절이면 천제단에는 소머리가 놓이고 태극기가 휘날린다. 산 자체로 이미 하나의 거대한 제단인 태백산에는 대찰(大刹)이 없다.

풍경을 가장 조망하기 좋은 장소는 태백산 표지석 주변이다. 천왕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표지석의 주변은 태백산 등정 '인증샷'을 남기려는 등산객들의 카메라 셔터소리로 요란하다. 시선을 좌에서 우로 천천히 옮기자 파노라마처럼 설경이 펼쳐진다. 태백산을 중심으로 흘러내린 수많은 봉우리들이 희미한 흑백을 경계선으로 겹겹이 포개지며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웅장하되 밀어내지 않아 편안했다.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엄부(嚴父)의 모습이었던 태백산은 정상에서 자모(慈母)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가파른 세상을 살아내다 한 번쯤 아래를 관조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사면에 들러붙어 겨우 적었던 글들을 모두 지운다. 문장들로 풍경과 맞서는 일은 덧없다. 덧없음을 알면서도 또 다시 풍경을 향해 펜을 들이대는 모습도 참으로 덧없다.

 

   
 

 5. 에필로그

가파른 산길을 따라 발걸음도 가파르다. 눈 덮인 사면을 한걸음씩 움켜쥐며 나아가는 아이젠이 참으로 고맙다. 정상에서 500m쯤 내려오다 보면 망경사와 만나게 되는데 이곳 입구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1470m)에서 솟아나는 샘물, 용정(龍井)이 있다. 대한민국 100대 명수로 손꼽힌다는 용정의 물은 개천절에 올리는 천제의 제수(祭水)로 쓰이는데, 이날은 한파로 얼어붙어 있어 맛을 볼 수 없었다. 마른 김밥을 살얼음 낀 생수로 삼키며 반재로 향하는 발길이 아쉽다. 태백산의 봄은 들꽃으로 아름답다고 한다. 여린 초록의 풋풋한 비린내 깃든 샘물의 단맛은 상상만으로도 청량하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등산코스> 

유일사 코스 : 유일사입구 → 유일사 → 장군봉 → 천제단 (4㎞, 2시간 소요)

백단사 코스 : 백단사입구 → 반재 → 망경사 → 천제단 (4㎞, 2시간 소요)

당 골 코스 : 당골광장 → 반재 → 망경사 → 천제단 (4.4㎞, 2시간 30분 소요)

문수봉 코스 : 당골광장 → 제당골 → 문수봉 →천제단 (7㎞, 3시간 소요)

금 천 코스 : 금천 → 문수봉 → 부쇠봉 → 천제단 (7.8㎞, 4시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