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하늘을 걷어낸 햇살이 손등에 얕은 온기로 스며들었다. 겨우내 먼지 내린 자전거 안장을 털어내니 겨우 봄이 보이는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근처 화단을 둘러봤지만 겨우내 누렇게 말라붙은 풀들만 여전했다. 개나리의 마른 가지도 아직 기척이 없었다. 절기는 오래전에 겨울을 벗어나 저만치 앞서가고, 햇살은 나날이 온기를 더해가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봄은 참으로 더디다.

신문의 '금토일' 섹션 계획이 구체화된 게 작년 이맘때였는데, 다시 그때다. 되살아온 계절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날이 그날이어선 안 된다. 지난해 '금토일'의 시작은 '대전-청주 간 도보여행' 이었다. 당시 취재진은 마라톤 풀코스보다도 더 긴 코스를 대책 없이 걸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에 버금가게 고되되 다른 형태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기자들을 사로잡았다. 나재필 논설위원이 문득 지난해 여름에 인상 깊게 보았다던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옥천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에 편집부 이형규 기자가 자원의사를 밝혔다. 그만하면 '대전-청주 간 도보여행'에 버금가게 고되되 충분히 다른 형태일 듯싶었다. 이번엔 대전-옥천 간 자전거 왕복여행이다. 여기에 '향수 100리' 코스 돌기까지 추가다. 장장 300리(120㎞)에 육박하는 코스다. 당일치기 여행임은 물론이다.

   
▲ 호흡이 긴 여행에선 잘못 들어선 길도 마음을 조금만 너그럽게 열면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향수 100리 코스에서 한참을 벗어나 만난 추소리 병풍바위가 그러했다. 병풍바위는 추소리와 맞닿은 대청호반 위 700여m가량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산\'과 흡사하다하여 부소담악(芙沼潭岳)으로도 불린다. 세월과 지형의 변화가 빚어내는 절경에 감탄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병풍바위를 일컬어 \'소금강\'이라 예찬했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1. 굽은 길도 잘못 든 길도 아름다워라

중간에 추소리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향수 200리 코스를 라이딩했다면 올바른 코스였을 터이나, 우리는 향수 100리 코스의 기착지 정지용 생가를 향하고 있었다. 때문에 도착시간이 약 한 시간가량 지체됐다.

   
▲ 3월은 겨울과 봄의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난해 여름 ‘1박2일’ 팀이 머물렀던 물가로 봄 햇살의 촘촘한 입자가 쏟아지고 있었다. 겨우내 마른 껍데기로 버텼던 억새는 햇살 받아 바스러지며 바람에 흩날렸다. 그 아래서 하얀 쇠별꽃이 반짝였다. 꽃샘추위가 버텨도, 때 아닌 눈이 내려도, 계절의 경계는 결국 허물어지고 꽃은 피어나는 법이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직전,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과 마주쳤다. 봄기운 덜 올라와 마른 들판 너머 대청호는 적당히 기갈 해져 있었다. 낮아진 수면 위로 드러난 바위들이 언덕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고, 그 언덕 위 적절한 위치에 정자 하나가 그림처럼 놓여있었다. 바위와 수면이 만나는 그늘진 곳곳에서 설 녹은 얼음들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갓길에서 햇살의 온기를 조금씩 모아 피어난 쇠별꽃들이 반짝였다. 드넓은 보리밭은 푸르렀고, 물 오른 봄동도 경사진 노지에서 풋풋했다. 이 모든 풍경들이 수묵담채화를 펼쳐놓은 듯 아득해, 기자들은 한동안 자전거 안장에 몸을 실을 수 없었다. 비록 이번엔 길을 잘못 들어 물러가지만, 벚꽃 화사한 봄이 오면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길 위에 남겨놓고 자전거를 돌렸다. 오르막은 짧아도 길게 느껴졌고, 내리막은 길어도 짧게 느껴졌다.

옥천을 향해 북동진 했던 자전거는 정오를 넘기고서야 겨우 향수 100리 코스의 기착지인 정지용 생가에 닿았다. 향수 100리 코스 라이딩을 시작하기도전에 이미 100리 길을 달려온 기자들은 정지용 문학관 앞마당에서 잠시 퍼졌다. 고단한 움직임 뒤에 씹는 김밥은 별다른 찬 없어도 꿀맛이다. 생가 안 산수유나무 가지에선 어느새 부푼 여린 꽃망울이 어렴풋한 노란 빛깔을 끌어안고 있었다. 봄은 봄 속에 숨어있었다.

 

 

 

 

 

 

   
 

2. 울퉁불퉁한 길이어도 즐거워라

본래 코스에서 이탈해 육영수 여사 생가에 들른 기자들은 잠시 후 교동낚시터 방향으로 향하는 오르막으로 되돌아와 페달에 온몸을 실었다. 교동낚시터를 지나면 37번 구국도가 이어지는 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라이딩 코스의 시작이다. 신국도 개통 후 차량 통행이 뜸해진 37번 구국도는 이제 두 바퀴를 매개해 몸으로 길을 확인하려는 이들의 낙원이다. 장계관광지까지 이어지는 구국도에선 오르막과 내리막이 희비쌍곡선을 반복해 그린다. 오르막에선 저단기어로 헛발질하는 듯한 느낌에 막막했던 몸은 내리막에선 한 없이 가벼웠다. 과열된 몸을 식히기 위해 열렸던 땀구멍은 내리막에서 옷 틈새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바람을 무방비로 맞이하며 행복에 겨워했다. 저단 기어로도 벅찬 오르막에선, 끊어질듯 팽팽해진 체인에 위태로워하며 진을 빼기보다 잠시 안장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게 상책이다. 괜한 고집은 다리 근육 이곳저곳에 배기는 알로 돌아온다.

40여분 가량 페달을 밟았다면 바닥난 물자가 없는지 확인해야 할 시간이다. 구국도는 장계관광지에 다다른 곳에서 신국도와 합류하는데, 그 지점에 신토불이휴게소라는 작은 매점이 하나 있다. 이곳을 그냥 지나쳐버리면 코스에서 벗어나 장계관광지에 따로 들르지 않는 이상 다음 매점은 30㎞가량 떨어진 금강휴게소에 다다라서야 나온다. 물이나 간식거리 등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이곳에서 보충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차량 통행이 잦은 신국도가 한동안 이어지니 안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장계교 부근에 이르면 이정표 두 개가 나오는데 이중 하나는 장계관광지로, 하나는 안남면 방향으로 향해 있어 라이더들에게 혼선을 준다. 기자들도 깜빡 속아 장계관광지로 향하는 오르막에서 헤매다 자전거를 돌렸다. 장계관광지에 들를 계획이 없다면 바로 안남면 방향으로 이어지는 장계교를 건너면 된다.

장계교에서 인포삼거리를 거쳐 안남면에 이르면 둔주봉이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둔주봉은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반전된 한반도의 모습을 닮은 지형 때문에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다. 특히 지난해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 소개된 이후, 둔주봉 주위를 물돌이하는 금강이 빚어내는 풍경을 바라보고자 봉우리를 오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평범했던 산과 풍경이 서로를 만나 특별해지는 마법 같은 사태 앞에서 불현듯 옆구리가 시려온다.

 

   
▲ 장계관광지로 향하는 길에 만난 예쁜 벽화.

단비농원을 지나쳐 종미1길 방향 마을로 이어지는 소로로 들어서면 금강변이 지척이다. 마을회관과 경율당을 지나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하면 한동안 비포장도로가 이어진다. 가덕교 부근에 이르면 잠수교가 나오는데, 현재 공사 중이어서 진입할 수 없으므로 헤매지 말고 강변을 따라 가던 길을 재촉해야 한다. 노면의 굴곡이 안장을 타고 여과 없이 몸으로 전해져 MTB아니면 라이딩하기 어려운 코스지만 풍경만큼은 '향수 100리'라는 이름값의 연속이다. 처음이지만 왠지 모르게 정겹고 낯익은 풍경들이 강변을 따라 한 꺼풀씩 다가오면, 감탄 섞인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세대와 관계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서정이다. 겨울의 더께를 채 벗지 못한 풍경은 메마른 햇살을 튕겨냈지만, 그 안에서 터져 나올 채비를 하고 있을 봄은 꽃샘추위 속에서 농축된 긴장감으로 팽팽해져 있을 터이다. 머지않아 자전거 바퀴가 다녀간 길목마다, 눈길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강변은 온갖 색으로 물들어 풋기로 향기로워질 것이다. 길가 여기저기서 쇠별꽃들이 반짝였다. 봄은 봄 속에 숨어있었다.

 3.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행복하여라

 비포장도로가 끝나는 합금로2길부터 2차선 포장도로가 열렸다. 갑작스레 미끄러지듯 치고 나아가는 자전거에 신난 기자들은 지나간 풍경들을 잊고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합금리를 따라 굽이도는 금강변의 변곡점에 접어들자 그림자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던 햇살의 입자가 조금씩 줄어감에 따라, 역광이 드리우는 그늘이 짙어져 갔다. 조바심 속에서 기자들은 페달 밟는 속도를 더했다.

 이형규 기자의 자전거가 갑자기 파행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서로 간에 벌어진 길을 되돌아가 자전거를 살펴보니 바람 빠진 뒷바퀴 타이어 바깥으로 볼썽사납게 튜브가 삐져나와 있었다. 쇠사슬의 가장 약한 부분이 끊어지면 강한 부분은 무용하듯, 비포장도로에서도 무탈했던 바퀴의 예상치 못한 펑크에 나머지 두 자전거도 일제히 레이스를 멈췄다. 아무런 수리 장비도 가지고 있지 않아 난감했지만,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금강휴게소 건물이 서있었다. 기자들은 모두 안장에서 내려 휴게소를 향해 느린 물결을 따랐다. 현실적으로 코스 곳곳에 수리 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예산상 비효율적일 터이다. 그러나 '자전거의 고장'을 자처하는 옥천군이 외지인들을 더 많이 불러 모아 호응을 얻으려면, 최소한 이동식 수리 서비스 운영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라이딩 코스는 따로 수리 장비를 휴대하지 않는 이상 돌발상황시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기자들은 "코스를 미처 다 돌지는 못했어도, 대전서 옥천까지 달려온 거리와 헤맸던 거리를 더해서 생각하면 족히 100㎞ 이상은 타지 않았느냐"며 멋쩍은 변명과 남은 길에 대한 걱정을 길 위에서 쏟아냈다.

 그때 온라인뉴스부 우희철 부장으로부터 안부전화가 걸려왔다. 이런 저런 사정을 털어놓자 우 부장은 지인으로부터 "용달차를 빌려 휴게소로 달려오겠다"는 웃음 섞인 말로 전화를 끊었다. 구원은 때때로 전혀 상관없는 장소로부터 극적으로 다가오곤 한다. 난감함을 걷어내자 느린 발걸음 닿는 풍경들이 참으로 아늑하게 다가온다. 금강휴게소 건물이 점점 더 크게 눈에 들어온다. 초저녁 햇살이 예전 같지 않게 따사롭다. 지난해 갈무리를 끝낸 들녘이 다시 채워지고 있다. 봄은 봄 속에 숨어있었다. 


옥천=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황의택 기자 missman@cctoday.co.kr 

 

   
▲ 장계관광지내 세워져 있는 정지용 시인의 생애비.


 p.s. 금강휴게소 이후 못다한 코스는 다음과 같다. 휴게소와 향토음식 거리를 잇는 굴다리를 지나 강변을 따라 달리다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금암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굴다리가 나오는데, 굴다리를 지나 좌회전해 달리다보면 비닐하우스가 보이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서 달리다 석탄2리 버스정류장을 만나면 또 우회전한다. 그 길을 따라 직진하면 안터선사공원에 이르고 거기서 좌회전해 낮은 언덕을 넘으면 기착지은 정지용 생가에 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