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말마리 마을 숲은 마을의 논과 밭이 다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일과를 마친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으로서 친밀한 공간이기도하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말마리마을은 면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2.6㎞가량 소로를 따라가면 닿는 고요한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깊은 편이어서 약 500여 년을 헤아리는데 입구엔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조그마한 마을 숲이 조성돼 있어 노거수 몇 그루가 우뚝하다. 말마리 마을 숲은 대문을 열면 건너다보이는 숲이다. 멀어서 어려운 숲도, 수세로 사람을 압박하는 숲도 아니다. 마을의 논과 밭이 다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숲은 일과를 마친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으로서 친밀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같은 친밀함의 밑바닥에 깔린 정치적 배후는 만만치 않다. 기실 말마리마을은 정치적 아귀다툼의 극단으로부터 벗어나 건설된 오래된 피안의 땅이기 때문이다. 숲에는 오래된 이야기를 갈무리한 비석이 남아 마을의 역사를 전하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 중기 살벌한 사화(士禍)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소요유(逍遙遊)했던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1473~1533)과 이를 흠모했던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다.

 

   
 

말마리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김세필은 개촌자(開村者)로서 각별한 존재다. 역사적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김세필의 모습은 벼슬길에 나아가길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데 연연하지 않았던 고고한 선비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돼 거제도에 유배 중이던 김세필은 중종 반정이후 열린 새로운 세상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벼슬은 대사헌·이조참판에 이르렀고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했던 사조는 정암(靜庵·조광조의 호)의 성리학 근본주의에 입각한 도학정치(道學政治)였다. 원칙으로 벼려진 젊은 이성의 칼은 기득권에 기대어 권력을 농단하는 훈구파(勳舊派) 원로대신들을 겨눴다. 위협을 느낀 훈구파들은 연대해 이들을 짓눌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사적이었다. 구 주류와 신 주류가 서로를 향해 겨눈 칼은 재차 사화로 번졌다. 기묘(己卯·1519년)년 정암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림들이 사사(賜死)됐다.

김세필 또한 당대의 사림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으로 작동되는 정치를 이상향으로 여겼던 듯하다. 사은사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김세필은 기묘년 초겨울 경연에 입시해 논어(論語)를 강독하던 중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過則勿憚改)'는 대목에 이르러 임금에게 정암의 사사의 부당함을 직언했다.(기묘록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김세필전(金世弼傳) 참조) 임금의 입을 빌린 훈구파 원로대신들의 칼날이 김세필의 지척에 닿았다. 비록 벼슬 삭탈 및 파출로 끝나 목숨은 건졌지만 무너진 이상은 당대엔 건져질 수 없는 것이었다. 명분 없이 피 흘리는 세상에 작별을 고한 김세필은 다시는 벼슬길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김세필은 지비천(知非川·현 팔성리)에 은거하며 후학을 기르다 오해 많았던 생을 마쳤다. 그는 영조 22년 (1746년) 영의정 김재로의 청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말마리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김숭열(79) 옹은 "김세필이 낙향하자 배움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때부터 마을과 숲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며 "김세필의 본관은 경주인데, 마을 사람들 상당수가 경주김씨이며 김세필의 후손이다. 말마리는 경주김씨의 집성촌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 옹은 "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천서원(知川書院)은 김세필이 후학을 가르치지 위해 지었던 초옥으로부터 유래하는데, 현재 김세필·박상 등 여덟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며 "고종 때 서원철폐로 잠시 폐원된 바 있지만 중건된 이후 기미년(己未·1919년) 만세 운동 때를 제외하곤 매년 향제가 열리고 있다"고 자랑했다.

김세필이 마을사람들에게 개촌자로서 각별하다면, 박상은 마을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한 존재로서 각별하다. 당시 충주목사였던 박상은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김세필을 높이 평가해 자주 찾아 환담을 나눴다. 김 옹은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 "당시 마을이 제대로 형성돼있지 않고 풀숲이 두터워 말을 타고 김세필이 머무르는 초옥까지 가기엔 무리였다"며 "당시 박상은 지금의 마을 숲 자리(말개뚝)에 말을 메어두고 김세필을 찾아가 담소를 나누곤 했는데 여기서 마을의 이름(말마리)이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박상 또한 김세필과 마찬가지로 힘의 논리보다 이성의 지고함에 매료된 사림이었다. 출사 이후 박상의 행보 또한 당대의 사림들이 그러했듯 유배와 복귀, 좌천과 사직을 거듭하는 파행의 연속이었다. 또한 그는 젊어서 아내와 사별하고 어린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현전하는 그의 시문에는 은일한 삶을 동경하는 서정적인 표현들이 많은데, 박상은 김세필과 더불어 어지러운 세상을 단아한 시문으로 위로했다.

그는 당대에 문장으로 일가를 이룬 호남시단의 영수이기도 했다. 정조(正祖)는 박상의 시를 귀히 여겨 을묘년(1795년) "우리나라의 시 가운데에서는 오직 고(故) 교리 박은(朴誾)과 증 이조판서 박상(朴祥) 두 사람의 시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라며 "눌재집(訥齋集·박상의 글을 모은 책)을 중간(重刊)해 올리라"고 하교를 내렸을 정도다. (조선왕조 정조실록 참조) 박상은 김세필보다 이른 숙종 14년(1688년) 이조판서에 증직됐다. 그 또한 김세필과 마찬가지로 현실 정치로부터 멀어짐으로써 현실 정치 속에서 영예로웠다.

여전히 유림의 자존이 두터운 마을 숲에선 올해도 늙은 느티나무가 겨드랑이로 새잎을 돋아냈다. 숲 가운데엔 정자가 들어앉아있는데, 그 안에 서면 여린 잎과 바람이 만나 떠드는 소리가 살갑다. 여름을 닮아가는 봄볕에 연둣빛 나뭇잎이 푸르게 그을려갈수록 그늘의 서늘함은 더욱 깊어만 간다. 그늘 아래 평상에서 주인 없이 뒹구는 침목이 한가로워 보였다.

길에서 만난 촌로들은 "예전엔 나무가 더 많았는데 많이 죽어 지금은 이것 뿐"이라며 안타까워하면서도 "지금은 한가하지만 여름이면 그늘 아래 정자와 평상엔 앉을 자리가 없어 덜 늙은 사람들은 더 늙어야만 겨우 한자리 차지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여전히 마을에선 장유유서의 질서가 자연스레 작동되는 모양이다. 외지인이 숲에 대해 묻는 게 기특했는지 옛 기억을 추동당한 촌로들은 저마다 나무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논둑마다 햇살에 조요하게 빛나는 노란 애기똥풀이 정겹다.

음성=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