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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 남면 원청리 별주부마을은 옛이야기 '별주부전'을 관광자원화시킨 주민들에 힘입어 전 국민들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는 테마마을이다. 바다와 뭍을 가르는 방풍림 노루미숲엔 옛이야기와 관련된 지명과 흔적들이 구전으로 전해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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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에 가면 익숙한 옛이야기가 파도 거품을 타고 해안가로 밀려온다. 이곳엔 목숨을 건 욕망과 욕망의 치열한 줄다리기가 해학으로 버무려져 숲과 마을 곳곳에 머물고 있다.
태안군 남면 원청리는 이제 옛이야기 '별주부전'을 등에 업고 '별주부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는 테마마을이다. 본디 서해안에서 가장 바닷물이 푸르다는데서 유래하는 원청리(元靑里)라는 법정지명은 이젠 별주부전의 유명세에 밀려 지도 언저리에서 이름만 유지하고 있다.
옛이야기의 흔적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외지인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마을 입구엔 해송(海松)이 쭉쭉 뻗어 두텁게 방풍림을 이루고 있는데, 오래전 자라(별주부)는 용왕의 병환을 다스리는데 특효약이라는 토끼의 간을 구하고자 노루미숲과 지척인 용새골(龍塞)에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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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을 걷다 노루미숲안으로 들어서면 해풍에 젖은 싱그러운 솔향기가 뭍과 바다의 경계를 가른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
민박집과 펜션이 이국적인 모양새로 휴가철이면 대처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작은 마을엔 '토끼가 간을 떼어 청산녹수 맑은 샘에 씻어 감춰 놓고 왔다'는 묘샘과 궁앞 등 별주부전의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구전되고 있다.
바다와 마을 사이의 노루미재는 노루 꼬리를 닮은 지형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는데, 구사일생으로 뭍에 오른 토끼는 이곳에서 "간을 꺼냈다 넣었다 할 수 있는 짐승이 세상에 어딨느냐"며 "명이란 것은 다 하늘의 뜻이니 쓸데없는 망령부리지 말고 죽을 날이나 기다리라고 용왕에게 전하라"고 자라를 조롱했다. 자라는 노루미숲으로 달아나는 토끼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하다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서 바위가 됐다. 드넓은 모래사장에 홀로 우뚝한 자라바위는 아직도 뭍과 바다사이에서 머뭇거리며 돌아오지 않는 토끼를 기다리고 있다. 바위 옆엔 자라 등에 올라탄 토끼의 모습을 담은 화강암 조각상이 서있는데 토끼의 표정이 매우 익살스럽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바위 앞에서 용왕제를 올려 용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여느 용왕제와는 달리 풍어제가 아닌 기원제를 올리는 주민들의 익살도 별주부전 속 토끼 못지않다. 용왕제에선 소를 한 마리 잡아 머리는 용왕에게 바치고 몸통은 모인 사람들끼리 나눠먹는다. 나눠먹을 때는 마을 사람, 외지인을 나누지 않는다.
자라의 허탈한 심정과 용왕의 안녕과 관계없이 자라바위를 둘러싼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바위에 올라 뭍을 바라보면 해안선을 따라 바리게이트처럼 끝도 없이 늘어선 해송 방풍림이 절경을 이룬다. 뒤돌아서서 바다로 시선을 돌리면 거아도·울미도·삼도·자치도 등 크고 작은 섬들과 낡은 어선 몇 척이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석양에 제 몸을 내준 숲이 바다 위에 쏟아지는 낙조와 더불어 자글거리면 옛이야기의 해학보다 생맥주의 청량감이 간절해진다. 이때만큼은 '원청리'라는 본래의 마을 이름이 '별주부마을'보다 무게감 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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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별주부마을이 별주부전의 원조를 자처하는 역사적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굳이 근거라면 숲과 마을 곳곳에 흩어져있는 별주부전 속 지명과, "…그랬다더라" 수준의 구전이 전부다. 심지어 현전하는 다수의 별주부전조차도 용왕을 동해(혹은 남해) 용왕으로 기록하고 있지 서해라고 기록하고 있진 않다. 그러다보니 저 멀리 남해와 맞닿은 경남 사천도 나름의 근거를 들어 별주부전의 원조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천에선 별주부전이 토끼의 비극으로 변주돼 전해지는데, 그 비극의 끝은 자그마한 섬(월등도·거북섬·비토섬)들의 이름으로 매듭지어져 있다. 월등도는 자라의 등을 타고 뭍으로 돌아오던 토끼가 바다에 비친 섬을 고향으로 착각하고, 급한 마음에 서둘러 뛰어내렸다가 물에 빠져 죽어 생긴 섬이다. 토끼를 놓친 자라 또한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월등도 옆에서 거북섬으로 머무르고 있다. 남편을 용궁으로 떠나보낸 토끼의 아내는 바다를 바라보며 오매불망 남편을 기다리다 바위 끝에서 떨어져 비토(飛兎)섬으로 남았다.
작자·연대 미상의 이야기를 두고 원조임을 다투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본디 주인 없이 떠도는 이야기이니 붙잡아 메어두고 길들이는 자가 주인일 터이다. 평범했던 원청리 마을과 노루미숲은 옛이야기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특별한 테마 마을로 탈바꿈했다.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은 익숙함과 새로움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이야기의 새로운 해석에 흥미를 느끼고 열광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보다 아는 것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별주부마을은 매년 몰리는 수만 명의 관광객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별주부마을의 자그마한 성공은 전적으로 희미한 이야기를 붙잡아 자신들의 자산으로 현실화시킨 주민들의 지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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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미숲 너머 바다에 간조가 들면 물 아래 감춰져 있던 거대한 돌담이 떠올라 장관을 이룬다.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는 거대한 구조물의 정체는 전통적인 어로방식인 독살인데, 이는 만조 때 휩쓸려 들어온 물고기들이 간조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어구(漁具)다. 주민들은 지난 2006년부터 마을 앞바다의 독살 9개를 복원해 체험관광코스로 운영 중이다. 이와 더불어 전통어구로 물고기를 잡는 어살문화축제도 함께 열린다.
해변을 걷다 노루미숲안으로 들어서면 해풍에 젖은 싱그러운 솔향기가 뭍과 바다의 경계를 가른다. 소나무를 헤집고 걷다보면 봄의 문턱을 넘으며 다소 억세진 햇살이 가지와 잎사귀에 쪼개져 부드럽게 살갗으로 스민다. 어설픈 안목 때문에 숲에서 토끼의 흔적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사연 많은 토끼가 어딘가에 숨어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다.
우연의 일치일까? 노루미재엔 토끼가 가장 좋아하는 풀이라는 참취가 지천에서 자란다. 이곳의 연간 참취 생산량은 국내 연간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훌쩍 뛰어넘는다. 실제로 이곳엔 토끼들이 많이 살았었고 지금도 한겨울 눈 쌓인 날이면 숲의 바닥이 토끼들의 발자국들로 어지럽다고 한다. 문득 이곳만이 별주부전의 원조라고 우겨보고 싶어진다.
태안=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