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동구 밖에서 비보림으로 조성돼 주민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던 금산군 금성면 마수리 소나무 숲은 이제 소나무 산림욕장으로 변신해 전 국민의 마을 숲으로 거듭나고 있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솔'이라는 글자에선 상형문자의 냄새가 난다. 자타공인 가장 과학적인 원리로 창제됐다는 한글을 두고 가장 원시적인 문자인 상형문자의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일은 위대한 예술 작품을 평범 이하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억지춘향 같아 겸연쩍다. 다만 '솔'이라는 글자가 특별히 그러하다는 것이다.

언어학적 근거는 없지만 '솔'이라는 글자는 다분히 회화적이다. 'ㅅ'이라는 자음은 우듬지를 중심으로 우산처럼 펼쳐진 솔잎을 닮아있다. 'ㅗ'라는 모음에선 우듬지 아래 사방으로 뻗은 잔가지들이 들여다보인다. 'ㄹ'이라는 자음은 자신의 모습처럼 격하게 굽은 밑동을 그린다. '솔'은 글자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영락없는 낙락장송이다. 따라서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고어(古語) '수리'가 변천해 지금의 '솔'로 이르렀다는 어원분석은 이 같은 억지춘향보다 설득력은 있을지언정 멀어서 적막하다.

솔숲에 들어서서 조락(凋落)한 솔잎들을 딛고 눈을 감으면 새잎을 매만지는 바람소리가 '솔솔' 들린다. 나무(木)에 나무(木)를 더하면 숲(林)이 이뤄지는데, '솔'에 '솔'을 더하면 솔숲과 더불어 바람도 태어난다. 솔숲에선 솔바람이 솔솔 분다. '솔솔'이라는 부사와 '솔'이라는 명사의 인과관계는 언어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아도 필연처럼 느껴진다.



충남 금산군 금성면 마수리는 금성면의 진산인 금성산(錦城山·439m) 자락에 깃든 작은 마을이다. 자연스레 '수리수리 마하수리'가 입가에 맴돌아 피식거리게 만드는 지명이지만, 사실 '마수리'라는 지명은 말머리를 닮은 마을 지형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밖에도 마을엔 말과 관련된 지명이 다수 존재하는데, 마책골(마책:말의 채찍)과 구세바위(구시: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구세는 방언)가 그것이다.

마수리가 속한 금성면은 금성산을 제외하곤 산지가 많지 않고, 기신천이 너른 평야의 중앙부를 동류하는 터라 내륙 지역에선 보기 드문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마수리 마을은 산을 등지고 완만한 비탈과 평야의 교접지에서 숨구멍을 틔우고 있다. 풍수상 금성면엔 천마지풍혈(天馬之風穴:말이 산자락을 박차고 승천하는 형세)과 선인망월혈(仙人望月穴:신선이 달을 바라보는 형세), 옥녀단장혈(玉女丹粧穴:선녀가 화장하는 형세) 등의 명혈이 숨겨져 있다고 전해져 예부터 금성산 주변을 헤매는 지관들이 많았다는데, 아직까진 명혈에 조상님을 모신 덕에 고관대작에 오르거나 거부가 됐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타 지역에 비해 배곯을 일은 적었을 터이니 이만하면 사람 살만한 명당이라 할만하다.

풍수상 안정된 마을은 안이 넓고 동구가 잘록한 마을이다. 마을 안이 넓으면 생산성이 좋고, 동구가 잘록하면 재리(財利)가 모이되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대개 마을 동구는 수구(水口)로도 불리는데, 수구는 산기슭을 따라 흐르는 물이 집결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기운이 모여드는 장소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따라서 수구막이를 위해 동구 밖에 숲을 가꾸고 보전하는 일은 한 마을의 대사였다.

마수리 마을과 가까워지면 가장 먼저 외지인을 맞는 것은 동구 밖에 조성된 소나무 숲이다. 여타 동구 숲들이 그러하듯 마수리 소나무 숲 또한 수구막이를 위해 조성된 비보림(裨補林)으로, 0.6㏊ 면적에 70~140년 수령의 소나무 40여 본이 동구 밖을 감싸고 있다.

마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동구 밖엔 낙락장송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숲이 훼손된 이후 마을 또한 폐촌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백낙헌(白樂憲)이라는 이가 150여 년 전 사재를 털어 빈숲에 쏟아 부었다. 숲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하자 주민들도 뒤따라 숲 가꾸기에 동참했다.

몸으로 시달려 숲의 영험함을 깨달은 마을사람들은 숲과 마을의 운명을 동일시해 삭정이 하나만 함부로 가져가도 쌀 닷 말의 벌금을 물렸다. 고사목이 생겨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고, 베어낼 적에는 반드시 마을총회의 결의를 거쳤을 정도로 숲을 다루는 마을의 법도는 지엄했다. 그렇게 숲은 점차 제 모습을 되찾았고, 마을의 횡액도 물러갔다. 팔도의 초목이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속절없이 베어지고 쓰러질 적에도, 마수리 소나무 숲은 주민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온전했다. 한국전쟁 중 경찰 별동대의 땔감용으로 숲이 사그라질 위기를 맞았을 때에도 주민들은 "나무를 건드리면 동네가 망한다"며 목숨을 걸고 숲을 지켰다. 물론 호(戶) 당 5000원씩 갹출한 뇌물의 힘도 컸다.

급격한 마을의 인구 감소로 숲의 영험함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마수리 소나무 숲의 신록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숲 안은 새잎의 숨결로 싱그럽다. 이젠 산림청과 금산군이 숲의 가치를 깨닫고 주민들을 대신해 숲을 가꾸고 있다. '상마수 소나무 숲 산림욕장'이라는 새 이름으로 탈바꿈한 동구 숲은 이제 지역구를 벗어나 전국구로 발을 내딛고 있다.

지난 밤 그친 비로 잘박거리는 오솔길 가에서 며칠 새 기다랗게 자란 애기똥풀 꽃대가 솔바람에 하늘거렸다. 벤치 틈새마다 고개를 내민 잡초들이 무질서 속에서 정겨웠다. 잔가지에 걸린 햇살 아래로 청신한 솔잎향이 아리다. 누가 뭐래도 숲에서 치유 받는 쪽은 결국 사람이다.

금산=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