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씹어 먹었던 아이돌들은 무슨 짓을 해도 감출 수 없는 클래스를 가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얼마 전 원더걸스가 그랬고 이번 소녀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소녀시대는 어쩌면 걸그룹이란 한계 자체를 넘어 신화와 비슷한 장수그룹의 길을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룹 이름이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소녀시절'이라고 할 수도 없고.
<정진영의 이주의 추천 앨범> 29. 소녀시대 정규 5집 ‘라이언 하트’ 외
유독 걸그룹에게 가혹한 환경인 가요계에서, 변화는 생존의 열쇠입니다. 소녀시대와 더불어 한 시대를 장악했던 걸그룹 원더걸스는 최근 악기를 집어 드는 전인미답의 변신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죠. 소녀시대는 지난 2010년에 발표한 세 번째 미니앨범 ‘훗(Hoot)’ 이후 아티스트의 면모를 강조한 다소 난해한 음악을 선보여 왔습니다. 이를 통해 소녀시대의 음악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났지만, 새로운 팬들을 끌어들일만한 소구력은 감소하는 결과가 일어났죠.
돌아온 소녀시대는 음악적 실험 대신 과거 ‘국민 걸그룹’의 이미지에 손상을 가하지 않을 만큼 성숙미를 더하는 선택으로 연착륙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번 앨범의 첫 트랙으로 복고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편곡과 코러스에 유려한 멜로디를 더한 타이틀곡 ‘라이언 하트’는 그런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죠. 앨범 전반부를 장식하는 ‘유 싱크(You Think)’ ‘파티(PARTY)’ ‘어떤 오후’ 역시 전작의 다소 선명하지 않았던 멜로디의 아쉬움을 잊게 만드는 반가운 곡들입니다.
소녀시대의 오랜 팬들에게 이 같은 변화는 크게 낯설지 않습니다. 성숙한 소녀시대의 모습은 이미 일본 활동을 통해 익숙하니까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소녀시대와 일본에서 활동하는 소녀시대는 서로 다른 그룹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른 콘셉트로 활동했습니다. 소녀시대의 일본 베스트 앨범의 수록곡이기도 했던 ‘쇼걸(Show Girls)’, ‘체크(Check)’ 같은 곡은 일본 활동을 통해 쌓은 노하우를 자연스럽게 한국 활동에 결합한 예이죠. 그 결과 전작보다 다가가기 쉬워진 소녀시대가 완성됐습니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소녀시대가 ‘지(Gee)’를 부르던 시절의 음원 파괴력을 다시 보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소녀시대는 지금까지 어떤 걸그룹도 가져보지 못한 탄탄한 팬덤과 언제든지 평균 이상의 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원 차트 성적과 관계없이 ‘국민 걸그룹’이란 타이틀이 유효한 이유입니다. 어쩌면 소녀시대가 걸그룹 중에선 최초로 신화와 비슷한 길을 걸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드는군요.
※ 살짝 추천 앨범
▶ 실리카겔 미니앨범 ‘새삼스레 들이켜 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 공간감 넘치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이를 시각화하는 서사적인 구성, 그리고 그 위에 살아있는 유려한 선율들. 듣는 것만으로도 무중력과 우주 유영이 가능하다면 너무 심한 ‘뻥’일까? 이 앨범은 17분 14초에 걸쳐 그런 환상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미니앨범이란 사실이 무척 아쉽다. 미니앨범만 아니었어도 지난주 최고의 앨범이었다.
▶ MBC ‘무한도전 영동고속도로 가요제’= ‘무도가요제’ 음원이 차트를 씹어 먹는 건 그저 ‘무도빨’ 때문 만이 아니다. 이전 ‘무도가요제’ 음원에 비해 ‘후크’는 덜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괜찮은 곡들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상주나의 ‘마이 라이프(My Life)’는 감상용으로도 멋진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 아닌가?
▶ 위헤이트제이에이치(we hate jh) 정규 1집 ‘더 나이브 키즈(The Naive Kids)’= 청년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풋풋한 감성과 열정. 어쿠스틱 사운드를 강조한 역동적인 연주로 듣는 위헤이트제이에이치의 이모(Emo)는 기분 좋은 청량감으로 가득 차 있다. 한때 국내에 불타올랐다가 가라앉은 이모에 위헤이트제이에이치는 좋은 대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 니올 ‘왓츠 유어 네임(What’s Your Name?)’= 힙합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 펑크(Funk) 등 다양한 장르의 요소를 도입해 장르의 벽을 세련되게 허무는 음악들. 곡마다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은 프로듀싱이 돋보이는 앨범.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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