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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동구 숲들이 그러하듯 절골 느티나무 숲 또한 트인 마을 앞을 풍수상 비보하기 위해 조성된 마을 숲이다. 간혹 버드나무와 감나무도 눈에 띄지만 숲의 주된 수종은 느티나무다. 나무들은 대체로 크고 건강한 편인데 가장 큰 나무의 흉고직경은 무려 130㎝에 달한다. 본디 주민들만의 소소한 공간이었던 느티나무 숲은 1991년 복토 및 평탄화 작업을 거쳐 공원으로 탈바꿈해 각지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영동=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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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은 백두대간의 길목이다. 지리산을 향해 거침없이 남쪽으로 내달리던 백두대간은 삼도봉(1177m)과 부딪혀 사방으로 정기를 쏟아내는데, 영동군의 최고봉 민주지산(1242m)은 넘치는 기운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삼도봉보다 더 우뚝 솟았다. 솟아오르고도 주체 못한 기운은 북쪽으로 흘러넘쳐 각호산(1202m), 삼봉산(930m) 등의 봉우리를 낳고, 그사이 무뎌진 가파름은 완만한 능선으로 흘러내려 곳곳에 골짜기를 일궈냈다.
부처는 산자락 깊숙한 곳에 자그마한 극락세계를 가람배치했다. 사람들은 절집의 비보(裨補)아래 가멸찬 산 기운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마을을 이뤘다. 구릉이 낮고 평지가 발달해 예부터 절골에선 임산물과 과수재배가 성행했다. 외풍은 적고 물이 많아 예부터 마을은 넉넉하고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마을 위 절집을 은혜로운 존재로써 신성시 여겼고, 자연스레 마을 이름 앞엔 '절'이 접두어로 붙었다. 이제 절골은 행정상 영동군 영동읍 화신리라는 법정지명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마을을 '절골'이라 부르고 동구(洞口)에 자랑비까지 세워 안녕과 풍요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1. 좋은 기운 가득한 마을숲
자랑비를 지나 마을 입구로 다가서면, 너른 바닥에 서늘한 음영을 드리우는 높다란 느티나무 숲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개 동구 숲들이 그러하듯 절골 느티나무 숲 또한 트인 마을 앞을 풍수상 비보하기 위해 조성된 마을 숲이다. 간혹 버드나무와 감나무도 눈에 띄지만 숲의 주된 수종은 느티나무다. 나무들은 대체로 크고 건강한 편인데 가장 큰 나무의 흉고직경은 무려 130㎝에 달한다. 본디 주민들만의 소소한 공간이었던 느티나무 숲은 1991년 복토 및 평탄화 작업을 거쳐 공원으로 탈바꿈해 각지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입장객들에게 약간의 입장료(대인:1000원·소인:500원)를 받고 있지만 대부분 쓰레기 수거 등의 관리비용으로 쓰이고 있다.
숲 앞엔 녹물 흘러내리는 흐릿한 철 간판이 서있는데, 한낮의 뾰족한 햇살 잦아드는 숲속은 간판 바깥세상과 유리된 별세계다. 숲속과 숲 바깥의 차이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는 것은 피부다. 갑작스레 서늘해진 바람에 움츠러드는 피부를 매만지며 숲 안으로 들어서면, 이파리에 걸러져 느슨해진 빛이 간접조명처럼 산란해 편안하게 눈으로 스민다.
숲 곳곳에 마련된 정자와 평상은 진작부터 소주 한 잔에 아랫배 뜨끈해진 피서객들의 차지다. 싱그러운 수향(樹香)과 비벼지는 삼겹살 기름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숲을 끼고 흐르는 맑고 얕은 실개울 속에서 치어들의 움직임이 경쾌했다. 개울 바닥에 깔린 자갈들은 느리게 이끼를 핥는 다슬기들의 차지다. 그중 덩치 큰 돌 하나를 까뒤집자 놀란 참개구리 한 마리가 튀어나와 자신과 비슷한 색을 가진 바위틈으로 황급히 피신했다. 그 좁은 틈새에서 참개구리는 불청객과 한참동안 눈싸움을 벌이다 또 다른 바위틈으로 재차 몸을 숨겼다. 물 흐르는 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 소리와 어우러져 청량했다. 술기운 오른 몇몇이 개울에 발을 담그며 둑에 몸을 기대거나 다슬기를 채집했다. 주변 상황이 이러하니 정자에 주저앉아 무위도식하고픈 마음을 버려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고개를 들면 가지마다 이파리 다복한 초록빛 세상이다. 초록이 가장 질리지 않는 색깔임을 숲에서 알겠다. 목긴 망촛대가 무리지어 바람에 하늘거린다. 움켜쥘 수 없는 시간의 빛이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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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숲 한 켠에 마련된 정자. |
2. 절골의 정신적 중심 중화사
중화사(重華寺)로 향하는 길의 초입은 설익은 포도열매 초록 빛깔 환한 샛길이다. 이어 산모퉁이를 돌아난 가파른 언덕길을 1㎞ 가량 숨 가쁘게 쫓아 오르면 아담한 산사가 길손을 맞는다.
산새 울음소리, 풍경소리,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사찰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판도 번듯한 이정표도 없지만, 중화사는 본디 그 자리에 있음이 당연한 것처럼 주변 풍경과 조화롭고 운치 있다. 활엽수림과 죽림에 둘러싸여 고졸한 멋을 풍기는 대웅전 앞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니 겹겹이 쌓인 산허리 너머 속세가 아련하다. 이쯤 되면 절이 길을 쫓아오는 게 아니라 길이 절을 쫓아왔다고 우겨볼만하다.
중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法柱寺)의 말사다. 중화사는 신라 문무왕대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대개 고찰들이 그러하듯 창건연대가 불확실하다. 중화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조선 시대에 집중되고 있다. '용화사가 남각산(현 삼봉산)에 있다(龍化寺 在南角山)'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성종(1469∼1494) 때 편찬된 지리지)에 보인다. 여지도서(與地圖書·영조(1724~1776) 때 편찬된 지리지)는 '새로 생긴 중화사가 고을의 동쪽 15리 되는 천마산의 삼봉 아래에 있다(新增重華寺 在縣東十五里 天摩山三峯下)'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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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고(梵宇攷·정조(1776~1800) 때 편찬된 사찰지)는 '용화사가 남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천마산에 중화사로 이어졌다(龍華寺 在南角山 今廢 續 重華寺 在天摩山)'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문헌을 종합해 보면 용화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중화사로 이어졌고, 최소한 300여 년 전부터 지금의 자리에 절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양식의 전형을 보이는 대웅전(1677년 중건) 또한 이 같은 추정을 방증하고 있다.
삼봉산은 가파르지 않은 등뼈로 13㎞가량 길고 완만한 능선을 그리며 영동읍 동남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절골의 정신적 중심인 중화사는 삼봉산 골짜기 깊은 곳에 깃들어 있다. 풍수적으로 외풍을 막고 좋은 기운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명당자리다. 거칠 것 없이 훤히 트인 전망이 풍수를 몰라도 길지(吉地)임을 짐작케 만든다. 그 기운이 흘러내리는 절골 마을 또한 명당일 터이다.
영동=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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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사 대웅전.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