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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읍내동 양유정 마을숲은 이제 버드나무를 의미하는 양(楊)과 유(柳)라는 이름이 무색한 숲이다. 숲의 주된 수종은 느티나무인데 이들은 오래전 이곳이 마을 동구로 기능할적에 비보림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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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바람 없는 날이면 풍경으로서 아름답기만 한 먼 숲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늘을 내어주는 가까운 숲이 각별해진다. 나무 그늘은 이파리가 햇살에 그을릴수록 더욱 짙어지기 마련인데, 그 음영의 강도는 그 어떤 수종(樹種)보다 느티나무 아래서 절정에 달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느티나무는 정자나무로 으뜸 대접을 받아왔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누워 가양(家釀) 막걸리 한 잔의 나른한 술기운에 기대어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일만큼 소박하고 호사스러운 피서도 드물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바라보며 기진맥진하는 피서는 차라리 피난에 가깝다. 무릇 피서는 가까운 곳에서 누려야 몸에도 마음에도 복된 일이다. 직사광선이 무방비로 살갗에 내리쪼여 목마른 날엔 가까운 사람과 더불어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가까운 마을 숲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가야한다. 가까운 숲엔 안주거리로 삼을만한 사연도 많다.
충남 서산시 읍내동 양유정(楊柳亭) 마을 숲은 버드나무보다 느티나무가 더 많은 오래된 버들 숲이다. 숲엔 버드나무를 이름으로 가진 정자(양유정) 하나가 서있는데, 정작 정자 주위엔 이파리 다복한 아름드리 느티나무들뿐이어서 그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한 때 숲의 주인이었을 버드나무는 느티나무의 득세에 밀려 고작 몇 그루만이 구석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있다. 또한 숲은 어색하게도 도로(양유정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독립된 공원 형태로 나뉘어져 있다. 숲엔 과연 무슨 사연이 머물고 있는 것일까?
한기홍 전 서산문화원 사무국장은 "지금 숲을 가르고 있는 도로는 실은 복개도로"라며 "본디 양유정 옆으로 개천(명림천)이 흘렀는데, 1980년대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생활하수의 다량 유입으로 수질 오염이 가속화됐다. 이후 1990년대 초반부터 복개 공사가 시작돼 중반 쯤 완성, 지금에 이른다"고 말했다. 복개와 더불어 물이 사라지자 옛 서산지역의 경승 서령팔경(瑞寧八景) 중 하나인 양류쇄연(楊柳鎖煙·양유정에 자욱한 물안개)도 자취를 감췄다.
이영하 서산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은 "복개 전인 60~7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 부춘산 옥녀봉과 명림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개천으로 흘러들어 천렵과 멱 감는 일이 흔했고,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많이 늘어서 있어 숲은 절경을 자랑했다"고 추억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다소 쇠락해진 숲의 현재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이 회장은 이어 "양(楊)과 유(柳)는 수양버들과 능수버들을 일컫는 한자인데, 정자가 버드나무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자가 들어서기 전부터 개천 양옆으로 버드나무들이 늘어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며 "현재 숲에 느티나무가 버드나무보다 많은 이유는 풍수적인 이유 때문이다. 양유정이 들어선 자리는 지리적으로 마을 동구에 속했기 때문에 느티나무는 풍수상 수구(水口) 막이를 위한 비보림(裨補林)으로 식재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수명이 긴 느티나무가 버드나무보다 오래 살아남아 지금과 같은 숲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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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인구가 줄어들어 예전만큼 북적이진 않지만 양유정 마을숲은 여전히 노인들에게 있어선 만남의 광장이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
오래전 물가를 향해 늘어져 멋스러웠을 버드나무 가지들을 더 이상 눈으로 즐길 수 없어 아쉽지만, 느티나무 융숭한 그늘 아래서 누리는 풍류도 그에 못지않을 터이니, 굳이 잃어버린 옛 정취를 그리워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현재 숲에 남아있는 느티나무는 11그루로 수령은 약 300~400년가량으로 추정된다. 서산시는 지난 1982년부터 이들 느티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해 특별 관리하고 있다.
1970년대 이전 마땅히 모일만한 공간도, 즐길 거리도, 볼거리도 없었던 시절, 서산의 유일한 공원이었던 양유정 마을 숲은 시민들의 만남의 광장이자 유희의 공간이었다. 그러다보니 숲은 당시 유력 정치인들로부터 단골 선거 유세 장소로 각광받았다.
이 회장은 "유진오 전 신민당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 등 당대의 명망 있는 정치인들은 선거 유세차 충청도에 들르면 반드시 양유정을 찾았다"며 "그밖에 3·1절, 광복절 등 각종 국경일 행사도 서산문화회관이 건립되기 전까진 이곳에서 열리곤 했었다. 즐길만한 오락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선거 유세나 기념일 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숲 안은 잔칫날처럼 인산인해를 이뤘었다"고 회상했다.
예나 지금이나 숲은 별다른 외양의 변화 없이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즐길 거리도 볼거리도 넘쳐나는 요즘,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숲에서 만나 놀지 않는다. 과거 서산 행정의 중심지 및 도심과 가까워 많은 유동인구를 자랑했던 양유정 마을 숲 주변은 이제 도심의 확대에 따라 한적한 주택가로 변모했다. 낮의 숲은 놀이기구를 즐기려는 동네 어린 아이들과 경로당을 오가는 노인들의 발걸음 소리 외엔 고요해져 갔다. 다소 낡고 오래된 숲의 각종 시설물들은 날이 저물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 사람들의 접근을 무언으로 차단했다. 밤의 숲은 어둠이 짙어져 어른 흉내를 내려는 청소년들로 흉흉했다.
이에 서산시는 숲의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지난 2009년 4월 서산시는 노후한 보호수 경계석을 걷어내고 원형 장의자를 설치했다. 일제 때 식재된 외래 수종 아까시나무도 제거했다. 낡은 팔각정이 철거된 자리엔 목재 팔각정이 새로이 들어섰다. 그렇게 숲은 다시 쾌적한 옛 분위기를 조금씩 되찾아갔다.
언제나 그래왔듯 여름은 늘 달력보다 일찍 문을 연다. 그리 넓은 숲도 아닌데 고작 몇 걸음 걸었다고 목 뒤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제 무게를 못 이겨 등고랑을 타고 흐른다. 짙은 나무그늘 아래에 서서 느티나무 높다란 우듬지를 올려다보니 '휴'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休'(쉴 휴)를 파자하면 '人'(사람 인)과 '木'(나무 목)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이른 더위에 들뜬 가슴을 가라앉혔다. 벤치에 앉아 고개를 젖혀드니 나무와 나무 사이로 산란하는 빛이 눈에 아리다. 이파리마다 이는 바람이 마른하늘 아래서 더욱 촉촉하고 서늘하다.
서산=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