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디마을은 계족산 동북쪽에 웅크린 작은 마을이다. 산디라는 이름은 마을이 계족산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마을 진입로를 감싼 활엽수림은 여름이면 계곡 물소리와 더불어 짙은 그늘로 청량감을 자아낸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예상치 못한 풍경과 만나는 일은 낯선 골목길에 들어선 것처럼 당혹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그곳이 의외의 장소라면 즐거움은 배가된다. 17번 국도를 타고 신탄진 방향으로 향하다 장동 산림욕장 방향으로 틀어 오르막길을 따라 언저리로 파고들면 대전 같지 않은 대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엔 은자의 마을 산디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산그늘 가까이로 다가서면 자동차 한 대 겨우 드나들 만큼 좁은 마을 진입로와 닿는다. 진입로 양 길가로 이파리 넓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데, 나무그늘 짙은 진입로는 한낮에도 빛이 성겨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미처 빗방울을 쏟아내지 못한 짙은 구름이 야트막한 산줄기마다 겹겹이 걸쳐 헐떡거리는데, 이때 진입로는 떨어지는 빗소리와 더불어 더욱 신비로워 진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도입부처럼 진입로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다. 그날 산디마을로 향하는 길목에선 많은 비가 내렸다.

   
 

산디마을은 계족산 동북쪽에 웅크린 작은 마을이다. 산디라는 이름은 마을이 계족산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좁고 긴 계족산 북쪽 골짜기는 장동에서 시작해 금강변 용호동 하용호까지 4㎞가량 이어지는데, 마을이 열두 골짜기에 자리 잡았다는데서 열두 산디로도 불린다.

징골·욕골·새골·터골·새뜸·산디 등 여섯 개 자연마을이 장동에 몰려있는데, 산디마을은 그중 계족산 정상 가까이 가장 깊은 골에 깃들어 있다.

산디마을의 전통가옥은 계족산 하단의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올라가며 형성돼있다. 이러한 모습이 벌집을 닮아 마을은 '벌터'라고도 불렸다. 여전히 땔감을 구해다 아궁이를 지피는 가옥이 있을 정도로 옛 모습이 잘 보존된 마을이다.

주민들은 본디 농업을 생업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최근 들어 산림욕장 및 계족산 둘레길 등을 찾는 외지인들의 증가로 마을에 요식업소가 늘었다. 파란 대문, 옥색 담장… 마을은 곳곳에서 조금씩 바깥의 색으로 물들고 있었는데 본디 마을의 색과 조화로운지는 의문이다.

여름의 계족산과 산디마을은 신록으로 물들어있어 특정 숲을 대표 마을 숲으로 부르기란 난감한 일이다. 그러나 산디마을 서쪽 입구 탑거리를 그늘로 덮은 활엽수림만큼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와 어우러져 계족산 내 여느 숲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 따라 늘어선 나이든 나무가 뿜어내는 향이 깊었다. 진입로 초입 그늘 짙은 숲 양편으로 두 개의 돌탑이 서있다. 마을 방향으로 섰을 때 왼쪽 언덕에 쌓인 돌탑은 할아버지 탑, 맞은편 계곡 건너 돌탑은 할머니 탑으로 불리고 있다. 할머니 탑 앞엔 거대한 연리목이 서있는데 특이하게도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살을 섞고 있다. 계곡을 사이로 두고 떨어진 노부부는 결국 연리목을 매개로 이어지는 듯 싶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정월 14일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탑신제를 올린다. 탑이 어느 시기에 조성됐고 또 언제부터 제를 지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주민들은 탑과 마을의 역사가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탑제는 지난 1998년 7월 21일 대전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옛 주민들이 하고 많은 장소 중에 유독 이곳에 탑을 세웠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탑 주변 활엽수림을 마을 숲이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터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인들도 탑신제에 대거 참여한다. 여기에 지자체 공무원들도 함께해 최근의 탑신제는 지역축제의 모습을 띄고 있다.

첩첩 산중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보니 예부터 마을에선 산짐승의 피해가 많았다. 이에 마을에선 탑신제말고도 매년 가을걷이가 끝나는 음력 10월 3일이면 산신제를 지내왔다. 제당은 마을의 동쪽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본디 지금의 당집 뒤 자연제당(사각형으로 길쭉하게 솟은 돌)에서 제를 지냈으나, 겨울에 제를 지내려면 춥고 힘들기 때문에 1950년대에 제당을 따로 지었다고 한다. 과거엔 흙담에 슬레이트를 얹은 2칸 집이었던 제당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노후돼 1995년 대전시에 의해 신축됐다.

그러나 신축된 제당은 2001년 등산객들이 비를 피하려 제당 주위에 놓은 불 때문에 소실됐다. 지금의 제당은 지난 2002년 대덕구의 지원을 받아 새로 지어진 것이다. 화재로 소실된 제기(祭器) 또한 같은 해에 새로 마련됐다. 제당의 오른쪽 뒤편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고이는 샘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를 신성시 여겨 제를 올릴 때만 물을 뜨고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 할아버지 탑 옆 동판이 산디마을탑제가 대전시 무형문화제임을 알려주고 있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비를 피해 나무그늘 아래로 들어서서 탑과 비석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늘어진 담쟁이덩굴 줄기 사이로 옥천전씨(沃川全氏) 세거지(世居地)라는 글자가 굵게 새겨져 있었다. 오래전 이들은 왜 자동차로도 한참을 파고들어야 모습을 드러내는 이곳까지 찾아와 삶을 세웠던 것일 것일까? 왜 산줄기로 삶의 배면을 차단하며 막막한 삶을 자처했던 것일까? 심호흡을 들이마시자 비릿한 수향(樹香)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고향은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라고 했던가? 며칠만 이곳에서 숨 쉬면 도돌이표 같은 일상에 상처 입은 삶이 치유될 듯 싶었다. 고향이란 결국 특정 공간이 아니라 막연하지만 아늑하고도 적막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숲을 찾기 전에 읽었던 마을에 대한 기록은 기록한 만큼만 기록하고 있었다.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 옛 주민들의 기억은 끝내 외지인에게 가닿지 않았다. 그러나 가닿지 않는 기억이어도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수향은 빗소리와 더불어 온몸을 저릿하게 만든다.

만 가지 초록이 층위를 이뤄 젖어서 부푼 산줄기 위로 한 겹 한 겹 보태진다. 제 무게 못 이긴 구름이 산중턱에 걸터앉아있다. 빛깔 고운 볏잎 위로 희미한 햇살이 엇비친다. 천하에 무릉도원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