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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추천 앨범

<정진영의 이주의 추천 앨범> 37. 브아걸 ‘베이식’ㆍ좋아밴 ‘저기 우리가 있을까’ 外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11. 11.

<정진영의 읽는 노래>를 올 초부터 연재하며 가사를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읽게 됐는데, 가사의 패턴들이 이토록 천편일률적인 줄 몰랐다. 

이는 가사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한정돼 있는데다, 표현 방법들이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운아이드걸스는 이번 앨범을 통해 타이틀곡의 제목처럼 '신세계'를 보여줬다.

브라운아이드걸스는 이번 앨범을 통해 가요의 가사로 표현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를 넓혀줬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좋아서하는밴드를 여전히 아마추어의 범주에서 바라볼지도 모르고, 또 이들의 음악을 다소 밋밋하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좋아서하는밴드의 앨범을 진지하게 들어봤다면 이 사실 하나는 부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좋아서하는밴드처럼 일상의 소박함을 특별하게 들리게 만들어주는 뮤지션이 또 있었나? 왜 이들이 거리에서 홍보 없이 공연만으로 수만 장의 앨범을 팔 수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좋아서하는밴드는 이번에 자신들의 커리어에서 역대 최고작을 만들어냈다.



<정진영의 이주의 추천 앨범> 37. 브아걸 ‘베이식’ㆍ좋아밴 ‘저기 우리가 있을까’ 外

[HOOC=정진영 기자] ▶ 브라운아이드걸스 정규 6집 ‘베이식(Basic)’= 기자들이 매일 이메일을 통해 받는 수많은 보도자료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과도하게 남발하는 수식어들이죠. ‘독보적인’ ‘트렌디한’ ‘업그레이드된’ ‘변신’ ‘음악적으로 성장한’ 등등 보도자료만 읽으면 이 음악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음악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런 수식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골룸’이죠. 

그러나 가끔 그런 과도한 수식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음악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독창적인 콘셉트, 예측불허의 음악과 파격적인 퍼포먼스”, “그녀들만이 소화할 수 있는 음악”. 걸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이하 브아걸) 정규 6집 ‘베이식(Basic)’은 앨범 보도자료에 담긴 수식어가 그리 낯 뜨겁지 않은 표현임을 증명하는 음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브아걸이 이번 앨범을 통해 묻는 것은 앨범 제목의 의미 그대로 ‘기본’입니다. 브아걸은 가요계에선 보기 드물게 같은 멤버로 10년 가까이 활동해 온 장수 걸그룹이죠. 가수의 ‘기본’은 좋은 보컬과 음악일 겁니다. 독창적인 콘셉트가 그 위에 더해져야 빛을 발하죠. 브아걸은 데뷔 초 ‘얼굴 없는 가수’ 콘셉트를 고민했을 만큼 탁월한 보컬로 주목을 받았던 ‘기본’에 충실한 걸그룹입니다. 다른 걸그룹이었다면 물의를 일으켰을지도 모를 ‘섹시 콘셉트’ 퍼포먼스가 설득력을 얻은 이유는 좋은 음악이란 ‘기본’ 덕분이었습니다. 지난 2010년 제7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음반’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노래’ 2관왕의 주인공이 브아걸이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오랜만에 ‘완전체’로 돌아온 브아걸은 ‘기본’과 관련된 과학과 철학의 키워드를 사랑, 행복, 슬픔, 아픔 등 인간의 감정을 가사로 풀어내는 도구로 이용하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곡도 심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프로그레시브록을 연상케 하는 다소 심오한 가사와 메시지를 가진 타이틀곡 ‘신세계’는 이번 앨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곡이죠. 리드미컬하게 곡을 짚어나가는 베이스와 복고풍의 비트 위에서 심각하게 주제에 빠져들 일은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정말 우주적으로 들립니다. 적재적소에 브라스를 삽입한 경쾌한 사운드와 리듬으로 무장한 ‘웜홀’에서 여러분은 천체물리학을 상상하실 수 있나요?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구조를 의미하는 ‘프랙털(Fractal)’이란 제목으로 이별을 노래하는 브아걸의 모습을 보면 기가 찰 정도입니다. 브아걸은 이 앨범을 통해 가요로 다룰 수 있는 소재와 표현 방법의 범위를 한 단계 넓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앨범을 통해 브아걸은 ‘독창적’이란 수식어를 한동안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얻은 것 같군요.




▶ 좋아서하는밴드 정규 2집 ‘저기 우리가 있을까’= 노래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필수조건은 공감일 겁니다. 대부분의 노래들이 사랑이란 주제를 끊임없이 변주하는 이유 역시, 사랑이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사랑을 주제로 다룬 노래들이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일도 쉽지 않죠. 너무 많으니까요.

좋아서하는밴드(이하 좋아밴)는 누구나 꺼내놓을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특별하게 들리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포근하게 보듬어 주는 진솔한 가사와 이를 실어 나르는 따스한 멜로디.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고 기억에 오래 남는 좋아밴의 음악은 밥벌이에 치여 잊어버린 좋았던 순간들을 아름답게 되살리는 마법을 보여주곤 합니다. 좋아밴이 지금까지 별다른 홍보 없이 거리에서 판매한 수만 장의 앨범은 그 마법의 증거물이죠. 음악이 만약 온도를 가지고 있다면, 좋아밴의 음악을 향한 온도계의 눈금은 36.5℃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동안 좋아밴은 멤버 각자 만든 노래를 스스로 부르고, 앨범에는 각 멤버들의 곡을 비슷한 비율로 담으며, 멤버들이 직접 프로듀싱을 하는 것을 규칙으로 움직이는 밴드였죠. 지금까지 좋아밴은 밴드라기보다는 사실상 싱어송라이터들의 집단에 가까웠습니다. 한 팀으로 모여 활동하는 이유와 팀의 정체성에 대한 멤버들의 고민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죠. 고민 끝에 멤버들은 과감히 외부인에게 앨범 제작의 지휘를 맡기고 변화를 시도하는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멤버들의 선택은 영화음악감독이자 밴드 우쿨렐레 피크닉의 멤버인 이병훈 프로듀서였죠. 이병훈 프로듀서는 프로듀서뿐만 아니라 편곡, 연주까지 도맡으며 앨범 제작 전반을 지휘했습니다. 

이번 앨범에 담긴 곡들의 정서는 전작을 잇고 있지만, 표현 방법은 적지 않게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멤버들 각자 곡을 만들고 그 곡을 각자 불러왔던 좋아서하는밴드는 그간의 방식에서 벗어나 곡에 가장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번 앨범 대부분의 수록곡에 멤버들의 목소리가 골고루 들어간 이유이죠. 또한 멤버들은 그동안 각자 연주해 온 악기들을 놓고 노래 그 자체에 집중했습니다. 색소폰, 현악 세션 등의 추가로 전작에 비해 편곡이 다채로워졌지만, 목소리는 담백해진 것도 큰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조명할 줄 아는 좋아밴의 재주는 더욱 섬세해졌습니다. ‘명왕성’은 그 섬세한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는 곡이죠. 가늘고 긴 타원형 궤도를 돌며 태양에서 멀어짐과 가까워짐을 반복하는 차가운 왜행성 명왕성. 누군가에게 가까워지고 싶어 애쓰는 마음과 더 멀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명왕성에 빗대 그린 애틋한 가사. 좋아밴의 치열했던 고민은 결국 밴드의 최고작으로 꼽힐만한 앨범이란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 살짝 추천 앨범

▶ 정새난슬 미니앨범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모던 포크, 오케스트라, 아카펠라 등 다채로운 음악으로 섬세하게 엮어 펼쳐낸 청춘, 사랑, 결혼, 출산에 관한 이야기들. 자신의 여성성을 내밀한 시선으로 돌아보는 가사와 이를 연민하지 않는 담백하면서도 몽환적으로 읊조리는 목소리. 주목할 만한 싱어송라이터가 조용하게 탄생했다.

▶ 루시아 정규 3집 ‘라이트 앤드 셰이드 챕터 2(Light & Shade Chapter.2)’=사랑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가장 우아하게 표현할 줄 아는 목소리. “너의 존재 위에 무언가를 두지마/어떤 내일도 오늘을 대신할 순 없어(‘너의 존재 위에’ 中)”처럼 삶을 긍정하는 시를 닮은 가사도 전작 이상으로 설득력이 높아졌다. 다만 다음에는 조금 덜 우아해졌으며 좋겠다.

▶ 베일(V.E.I.L) 정규 2집 ‘커밍 홈(Coming Home)’= 추억의 가수 김원준이 프런트맨이라는 이유로 과도한 기대를 할 필요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도 없다. 추억팔이의 혐의가 있었다면 이렇게 밴드로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앨범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록의 질감을 강조한 사운드를 담은 곡들을 정규 앨범으로 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사건. 

▶ 민치영 미니앨범 ‘노 마이 네임(Know My Name)’= 80년대 말부터 90년 초ㆍ중반에 가장 개성적인 목소리를 들려줬던 록 보컬리스트 민치영의 솔로 복귀작. 덥스텝, 엠비언트 등 록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을 들려주려 애를 쓴 흔적이 보이는 앨범. 앨범 발매 자체만으로도 반가운 이름이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