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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53. 우리가 아는 아카시아는 아카시아가 아니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6. 5. 12.

작년 이맘 때 쓰려다가 때를 놓쳐 못 쓴 주제이다.

이미 오랫동안 문제제기된 주제인데, 앞으로도 변화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5월 13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화사한 봄꽃이 지나간 자리를 채우는 신록은 봄의 종언과도 같습니다. 신록을 기점으로 파스텔 톤의 봄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원색의 여름꽃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말입니다. 여름꽃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 막간의 주연은 향기입니다. 이맘 때 신록을 거쳐 불어오는 바람에는 달콤한 향기가 스며들어 있죠. 초여름은 그렇게 아카시아꽃 향기로 먼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카시아는 아카시아가 아니란 사실을 아시나요? 아카시아는 사실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 아카시아는 호주 원산으로 열대지방을 중심으로 자라며, 꽃의 색깔도 노란색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구 밖 과수원길’에 흰 꽃을 활짝 피우는 나무의 정체는 무엇이냐고요? 바로 북미 원산의 아까시나무입니다. 아카시아와 아까시나무는 같은 콩과 식물이긴 하지만 실은 다른 식물입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에서 촬영한 아까시나무꽃.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이름의 혼선은 아까시나무가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빚어졌습니다. 아까시나무의 종소명 ‘슈도아카시아(pseudoacacia)’는 ‘가짜 아카시아(FalseAcacia)’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확한 문헌은 없지만, 아까시나무는 19세기 말 일본에서 가로수 용도로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까시나무의 일본 이름은 종소명를 충실하게 번역한 ‘니세아카시아(はりえんじゅ)’입니다. 아카시아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왔죠.

아까시나무라는 우리말 이름은 이 나무의 가시가 많은 특성을 살린 이름이지만, 어감이 낯설어 아카시아란 이름이 더 널리 쓰이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게다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까지 아카시아를 ‘아까시나무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해 혼선이 커졌죠. 하지만 아카시아라는 다른 식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이름을 고집하는 것은 아카시아에게 실례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까시나무라는 우리말 이름도 버젓이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아카시아. [사진 제공=Pixabay]

아까시나무는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나무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민둥산이 된 산림의 녹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나무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무이거든요. 아까시나무와 같은 콩과 식물은 질소를 고정시키는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또한 아까시나무의 꽃은 많은 꿀을 가지고 있어, 밀원식물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까시나무의 장작은 화력이 강하고 연기가 적어 땔감으로 그만이고, 잎은 영양가가 높아 가축 사료로도 좋습니다. 참 쓸모도 많고 고마운 나무입니다.

며칠 전 기자는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궂은 날씨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 거리의 공기에는 아까시나무꽃의 향기가 짙게 서려 있더군요. 기자는 오랜만에 손이 닿는 아까시나무 가지에서 꽃송이를 따 먹어봤습니다. 풋내와 단내가 뒤엉킨 비릿한 맛. 여름은 아까시나무와 더불어 봄의 한복판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