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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68. 소박한 ‘주름잎’이 발휘하는 탁월한 생존의 지혜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6. 9. 8.

주름잎은 이맘 때 우리 주변에 정말 흔한 식물이다. 

그저께 구로 지역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에도 꽃을 피운 녀석을 여럿 확인했는데, 아무도 알아보는 이들이 없었다. 


들꽃을 찾는 재미는 큰 꽃보다 작은 꽃을 찾을 때 더 크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큰 꽃의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작은 꽃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을 리가 없다. 

작은 꽃을 피우는 식물들도 저마다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도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실에선 대부분 '잡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일쑤이지만.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9월 9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들꽃을 오랫동안 눈에 담아오다보니 기자에게 생긴 습관 하나가 있습니다. 걸을 때마다 시선이 늘 아래로 향한다는 겁니다. 콘크리트 바닥의 균열, 보도블록 사이의 틈새, 잘려나간 가로수의 밑동 등 도시의 거리에서 별볼일 없어 보이는 후미진 공간은 기자에게 보물창고나 다름 없습니다. 이런 공간에는 제철을 맞은 아기자기한 들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어있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이런 공간에서 들꽃을 만나는 일은 기자에게 마치 소풍날 보물찾기에서 숨겨진 쪽지를 발견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주름잎은 이맘 때 발견할 수 있는 숨겨진 쪽지 중 하나이죠.


대구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에서 촬영한 주름잎.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주름잎은 현삼과의 한해살이풀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습니다. 주름잎은 밭이나 습한 곳에 뿌리내려 늦봄부터 가을까지 1㎝ 안팎의 작고 연한 자주색 꽃을 피웁니다. 통통하게 솟아오른 꽃의 가운데 부분이 독특하게 생겼죠. 주름잎이란 독특한 이름은 기온이 내려가면 쭈글쭈글해지는 잎의 모양에서 유래합니다. 다소 별난 모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름잎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꽃이 너무 작은데다 바닥에 들러붙어 피어나다보니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지나쳐버리기 십상이거든요.

작디작은 주름잎의 생존무기는 질긴 생명력입니다. 주름잎은 비록 한해살이풀이지만, 생육기간 내내 말라죽을 때까지 쉴 새 없이 꽃을 피웁니다. 늦봄이나 늦가을에도 꽃을 피운 주름잎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정도이죠. 또한 주름잎은 마르지 않은 곳이라면 뿌리내릴 터를 가리지 않습니다. 무심코 내딛는 발길에 짓밟히면서도 꽃 피우는 일을 멈추지 않는 주름잎의 모습은, 묵묵히 이 땅을 지켜온 민초들을 닮은 것 같아 정겹습니다.

그러나 질긴 생명력만이 생존무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꽃에선 고도의 전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름잎의 꽃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꽃잎 위에 자리 잡은 짙은 노란색 반점이 보일 겁니다. 이 반점은 벌들이 쉽게 꿀샘을 찾을 수 있도록 주름잎이 마련해놓은 ‘허니 가이드(Honey Guide)’입니다. 벌이 반점을 따라 꽃 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사이에, 벌의 몸 여기저기에 자연스럽게 주름잎의 꽃가루가 묻게 되죠. 주름잎이 오랜 세월에 걸쳐 터득한 생존의 지혜입니다. 


서울 홍대입구 부근에서 촬영한 주름잎.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주름잎의 꽃말은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입니다. 꽤 극적으로 들리는 꽃말이 아닌가요? 부족한 존재감 때문에 잡초 취급을 받는 작은 꽃이지만, 주름잎은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우리 곁에 머물며 꽃을 피울 것입니다. 시골의 밭두렁뿐만아니라 척박한 도심에도 기어코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주름잎의 생명력은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이름 모를 잡초 대신 주름잎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면 일상이 조금은 더 풍성해질 겁니다. 주름잎 주변에는 다른 들꽃들도 많이 피어있으니까요.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