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 날 나는 하루 종일 혼자서 방구석을 긁어댔다.
딱히 할 줄 아는 컴퓨터게임도 없고 책도 읽기 싫어 빈둥대던 나는 맥주를 마시며 방 안을 하릴없이 쏘다녔다.
그러다 문득 책상서랍을 열어봤다.
오... 세상에... 이렇게 지저분했다니...
쓰레기 통을 방불케하는 서랍 속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 나는 지저분한 서랍을 한 번 정리해보기로 했다.
정리하다보니 서랍 속 이곳저곳에서 흥미로운 추억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별 생각 없이 잡동사니들을 정리할 것과 버릴 것으로 구분하던 나는 추억의 물건들로 시간에 묻은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중3 때(1996년) 구입한 '콜트25' 가스건이다.
당시 9000원이라는 거금과 바꾼 비비탄 총인데 일반적인 에어코킹건과는 달리 가스를 충전해 비비탄을 발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문제는 충전용 가스 가격도 9000원이어서 내 용돈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총이었다.
가스건 전용 가스가 떨어지자 하는 수 없이 부탄가스를 충전해 가지고 놀곤 했는데 결국 고장나고 말았다.
가스건 전용 가스에는 가스와 더불어 윤활유가 충전돼 있는데 부탄가스에는 부탄가스만 들어있으니 말이다.
중1 때(1994년) 구입한 베레타 에어코킹건이다.
내 기억으론 매일 매일 200원 씩 저금통에 모아 한 달만에 구입했던 총이다.
당시 6000원인가 주고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모양이 멋있어서 정말 가지고 싶었다.
총열에 총이름이 알파벳으로 홈이 파인 부분에 흰색 크레파스를 긁어서 홈을 메워 멋스러움(?)을 더했다.
여전히 잘 작동되고 있었다. 다만 피스톤이 오래돼 위력은 예전만 못했다.
아마 20~21살 무렵?
그때 경품으로 받은 요요다.
난 요요를 잘 가지고 놀지 못한다.
이젠 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으려나
3.5인치 디스켓도 다수 보였다. 고등학교 때(1997~1999년) 쓰던 물건이다.
더 뒤져보면 5.25인치 디스켓도 나올텐데 보이지 않았다.
무슨 내용물이 들어있나 확인하고 싶은데 드라이브가 없다.
20대 중반 쯤 토익 공부한다고 구입했던 아이와 카세트 플레이어.
별생각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놀랍게도 플레이가 됐다.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말이다.
무려 6~7년은 족히 지난 배터리에 아직 전기가 남아있었다.
흠좀무...
-
11년 전 학생증도 발견됐다.
내가 한 때 적을 둔적 있는 충남대학교 학생증.
법대 00학번으로 입학해 2학년 1학기까지 다닌 후 휴학한 뒤 재수를 준비했다.
군번줄이 어디갔나 했더니 서랍 속에 있었군.
SHURE 마이크!
한 때 락보컬을 지망했던 나는 언젠가 저 마이크로 노래를 부를 일이 있을 줄 알았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법시험 준비를 하면서 수험서에 밑줄을 치느라 닳도 닳은 플라스틱 자.
참 열심히도 공부했었지.
한양대 사법시험반 식권이다.
사법시험반에 입소하면 주거비는 공짜지만 밥값은 공짜가 아니다.
한달에 약 13만 원 정도를 지불해야 삼시세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매달 치르는 사법시험반 모의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밥값도 면제됐다.
나는 기를 쓰고 높은 점수를 받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3달에 2달정도는 밥을 공짜로 먹었다.
밥도 부지런히 빼놓지 않고 먹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주전부리를 안 하고 돈도 덜 쓰니까.
신림동 고시촌에서도 2년 가까이 기거한 일이 있다.
2007년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수강했던 강의들의 수강증들.
2006년 12월 25일.
디씨인사이드 주최로 당시 한나라당 (현 민주당 대표) 손학규 의원과 왕십리 곱창집에서 토론 배틀을 벌인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손학규 의원, 아니 정치인들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식견이 높은 사람들인지 그 자리에서 손학규를 보고 깨달았다.
다소 민감한 질문들이 오갔지만 손학규 의원은 디씨 폐인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나는 그때 질문 딱 한가지만 던졌다.
"한나라당 대선 주자로 못나가면 탈당하실 겁니까? 탈당하시면 이인제 처럼 나가리 될텐데요?"
손학규의 대답!
"국민의 뜻대로 될겁니다."
매우 실망스러운 답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2008년에 기거하고 있었던 원룸의 임대차 계약서
보증금 50에 월세 38만원. 그나마 주변 시세에 비해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더럽게 비싼 서울 집값.
사법시험반 근처에 한양여대 캠퍼스가 있는데 그 캠퍼스 지하에 헬스장이 있다.
공부를 마친 나는 헬스장으로 와 런닝머신에서 런닝이 아닌 걷기를 하며 예능 프로그램을 즐겼었다.
2006년 여름
맨날(이제 '맨날'도 표준어다) 앉아서 책만 읽다보니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중엔 몇 걸음 못 걸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다.
다행히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니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때 의자와 자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나는 거금을 들여 의자를 듀오백으로 바꿨다.
이후 통증이 사라졌다.
2007년에 구입한 로또도 발견됐다.
5년저? 4년전?
다이소에서 2000원을 주고 구입한 오르골도 발견됐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Fly to the moon'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20대 초반 자격증 취득에 미쳐있던 시절이 있었다.
많이 따놓으면 뭐라도 될것만 같아 무작정 달려들었다.
특별히 학원을 다니진 않았다. 그냥 모두 독학으로 취득했다.
그때 취득한게...
방송통신기능사를 시작으로 정보처리기능사, 정보기기운용기능사, 정보검색사, 워드프로세서 1급, 컴퓨터활용능력 2급, 전자상거래관리사 2급, 사무자동화산업기사, 정보처리기사 등등 얼추 20개 가까이는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다 쓸모없더라. --;
특히 컴퓨터 자격증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자격증들은 이후 엉뚱한 쪽에서 쓸모있게 쓰였다.
충남대를 자퇴한 후 한양대에 입학하기 직전 그 사이 빈 기간 동안 나는 학점은행에 등록했다.
사이버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이수한 과목과 자격증 등을 학점으로 인정받아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제도다.
그 제도를 통해 나는 충남대에서 이수했던 학점(54학점)을 그대로 살려 학점은행에 등록했다.
그리고 학점인정 자격증과 공익근무 중 사이버대학에서 이수한 교양학점 등을 합쳐 지난 2004년 컴퓨터공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고로 지금 나는 학사 학위가 두 개다.
나름 이공계 인력이란 말씀. 에헴!
중학교 2학년 질풍노도의 시기 야사에 미쳐있던 무렵
내 상상력을 자극했던 한단고기.
A4용지에 잘은 글씨로 인쇄해 한참을 읽어댔었다.
이런 것도 나오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나는 전자키트에 미쳐있었다.
지금도 나는 어지간한 공고생이나 관련 전공 대학생들보다 회로도 읽기, 납땜질을 잘할 수 있다.
2001년에 치른 방송통신기능사 실기시험 참고 교재
오실로스코프를 제대로 읽을 줄 몰라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붙었다.
그런데 자격증을 쓸 곳이 아무데도 없다.
2006년 한참 공부하던 시절
블루클럽에서 부지런히 머리를 잘랐었군
이런 가슴 아픈 물건도 나오다니.
공인노무사 1차 과목은 민법과 노동법1, 노동법2, 영어, 경제법 5과목인데
절대평가로 평균 60점만 받으면 합격이다.
다만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이면 평균 60점을 넘겨도 과락으로 탈락한다.
나는 60점을 넘기고도 경제법에서 과락을 맞아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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