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선생님은 내가 장편소설 '침묵주의보'를 집필할 때 끊임없이 격려해주고, 출간 당시 추천사까지 써준 고마운 분이다.
선생님께서 신작을 내실 때에 맞춰 문화부에서 문학담당 기자를 맡게 된 건 행운이다.
인터뷰보다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 썰을 푼 즐거운 시간이었다.
김탁환 작가는 ‘대소설의 시대’를 통해 18세기 조선 여성들이 역사상 유례 없는 장편소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역이라고 밝힌다. 민음사 제공 새 장편소설 ‘대소설의 시대’ 출간 김탁환 女가 쓰고 女가 읽었던 대소설 실제역사 배경에 상상력 입혀 추리극 구성으로 긴장감 더해 기존소설 캐릭터들 등장 흥미 한글 보급에 여성들 작품활동 ![]() 세계서 유례 찾을수 없는 역사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긴 소설이 18세기 조선 시대에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작자 미상인 이 소설의 제목은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으로 총 180권 180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소설의 분량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보다 훨씬 많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소설이 한 가문에서 여성들이 대를 이어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당대 여성들이 쓴 장편소설은 ‘엄씨효문청행록(嚴氏孝門淸行錄)’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쌍천기봉(雙釧奇逢)’ ‘소현성록(蘇賢聖錄)’ 등 파악된 것만 수백 편에 달한다. 18세기 조선은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없을 만큼 소설의 황금기였고 그 주역은 여성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같은 역사는 우리에게 공백으로 남아 있다. 김탁환 작가의 새 장편소설 ‘대소설의 시대’(민음사)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잊힌 18세기 소설사를 흥미롭게 되살린다. 김 작가는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18세기에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가 읽었던 대소설이 궁중을 중심으로 어떻게 창작 및 유통됐는지를 실제 역사에 상상력을 더해 풀어낸다.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만난 김 작가는 “세계 소설사에서 19세기는 대소설의 시대로 꼽히는데, 우리에겐 이보다 100년 앞서 대소설의 시대를 맞은 역사가 있고 훌륭한 작품을 쏟아낸 주역이 여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출간 소감을 밝혔다. 이 소설의 중심은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궁중에서 23년 동안 읽힌 ‘산해인연록(山海因緣錄)’이란 가상의 대소설이다. ‘산해인연록’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작가인 임두의 손녀와 제자 두 명, 혜경궁 홍씨와 의빈 성씨 등 몇몇 내명부 사람들 외엔 비밀에 부쳐져 있다. 199권까지 소설을 쓴 임두가 5개월 넘게 다음 권을 쓰지 못하자 내명부 사람들의 마음이 급해진다. 의빈 성씨가 의금부도사 이명방과 규장각 서리 김진을 은밀하게 불러 작가의 상황을 파악해보라고 지시하지만, 작가가 갑자기 사라지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여기에 목차로 등장하는 당대의 소설들이 사건 해결의 실마리로 쓰이며 추리 요소가 더해진다. 책을 덮기 전까지 결론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구성과 페이지를 넘길수록 쌓이는 긴장감이 읽는 즐거움을 준다. 김 작가는 이번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200여 편에 달하는 관련 논문을 읽으며 고증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김 작가는 “많은 사람이 영·정조 시대를 조선 문화의 황금기로 꼽지만, 정작 당대에 어떤 소설이 유행하고 읽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18세기는 소설을 팔고 유통하는데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을 즐기는 여성들이 많았던 순수의 시대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 김 작가의 ‘백탑파’ 시리즈 장편소설을 꾸준히 읽어왔던 독자라면 고정 캐릭터 이명방과 김진은 반가운 이름일 것이다. 김 작가는 18세기 실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집단인 ‘백탑파’를 등장 인물로 내세운 ‘방각본 살인 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목격자들’ 등의 작품으로 역사추리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백탑파’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인 이번 소설에도 박제가, 정약용, 김홍도 등 당대의 명사들이 대거 등장해 고정 캐릭터와 함께 이야기를 이끈다. 김 작가는 “학계의 연구 성과가 쌓임에 따라 작품의 내용이 점점 풍성해지고 있고, 작품마다 중심인물에 변화를 주는 시도를 통해 김진과 이명방의 캐릭터도 입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16년 동안 백탑파와 함께 해왔는데 앞으로도 그 세월 이상 그들과 함께하며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김 작가는 당대 소설 중 읽어볼 만한 작품으로 ‘소현성록’을 추천했다. 김 작가는 “‘대소설의 시대’ 이전의 한글 소설을 보면 잘못의 원인은 남자인데 비참한 최후를 맞는 역할은 늘 악처나 악녀 등 여자인 경우가 많았다”며 “‘소현성록’은 가부장 대신 가모장이 나서도 얼마든지 집안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 선구적인 작품으로 번역판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당대에 여성들이 작가와 독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한글을 꼽았다. 김 작가는 “한글은 한자 등 다른 문자와 비교해 익히기 쉬워 많은 여성이 소설의 세계에 뛰어들 수 있는 무기였다”며 “가까웠던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찾아봐도 여성들이 이렇게 대소설을 써낸 사례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작가는 “근대 소설의 주제는 계몽이나 애국이었고 이를 주도한 주체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쓴 소설은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며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무게감이 커지고 있는 지금, 18세기에 이미 훌륭한 여성 작가와 소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작가는 단편이 주류인 한국 소설계에서 장편에 집중하는 보기 드문 소설가다. 김 작가는 “당대에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를 파고들어 깊이 있게 담아낼 수 있는 문학 양식은 장편소설”이라며 “18세기 조선 여성들이 대소설로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아냈듯이, 오늘날에도 장편소설만이 우리 사회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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