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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내 살은 거 고생 말고 없어예… 억울치, 억울코말고”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9. 6. 16.

'할매의 탄생'은 올해 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여운을 남긴 책이다.

다 읽고 들은 생각은 한 가지.

할매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도 없었겠구나...







‘할매의 탄생’은 산골짜기 할머니의 삶을 구술로 듣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게 만든 힘의 근원을 살핀다. 왼쪽부터 이태경, 김효실, 곽판이, 유옥란, 조순이, 임혜순 할머니. 글항아리 제공

- 할매의 탄생 / 최현숙 지음 / 글항아리

자식 먹이고 키우는 보람으로

평생 고된 노동을 견딘 여인들

“다 늙어 허리가 곯아뿌렀어도

땅 한 뙈기 노는거를 아까버가

봄 되마 밭 갈고 씨 뿌리거든”

‘구술생애사’ 작가가 1년 걸쳐

농촌 노인 6명 얘기 듣고 기록

스스로 삶 개척한 원동력 발견


“내 살은 거는 마 고생한 거 말고 없어예. 모내기 해가 이삭 올라오마, 어떤 해는 그 이쁜 걸 물이 확 쓸어가뿟고 이삭이 시꺼멓게 썩어들어가는 거라. 어떤 해는 잘 자라가 대가리를 숙일마 해가 통통하이 그래 이뿐데, 또 홍수가 나가 꼬꾸라지고. 그래 쓸어가뿌마 나중에 벼가 말라도 아무것도 건질 기 없는 거라.”(조순이 할머니)

판소리의 한 대목 같기도 하고, 랩보다도 리듬감이 넘친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산골짜기 할머니들이 저마다 거친 사투리로 쏟아내는 인생사는 갓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살아있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지난 삶을 향해 서러움과 자괴감을 드러내다가도, 어느새 그 삶을 긍정하며 웃음으로 표정을 무너뜨린다. 





과거에 공동체의 존경받는 어른이었던 노인은 현대사회에서 무시되고 잊어졌다. ‘틀딱’ ‘연금충’ ‘노인충’ 등 노인을 가리키는 비속어에서,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노인은 존중은커녕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기울어졌음을 본다. 책의 저자 최현숙은 2016년 한국사회에서 노인과 세대갈등의 문제를 압축적으로 드러냈던 ‘태극기 부대’라는 남성 노인들의 목소리를 ‘할배의 탄생’(이매진)으로 묶어내 큰 사회적 반향을 부르고 독보적인 구술생애사 작가로 자리잡았다. 이번에는 여성 노인, 그중에서도 농촌·여성·노년·문맹 등 온갖 소외 유발 원인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산골짜기 할머니들을 만났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억압됐던 그들의 목소리에서 저자는 고통보다는 삶을 지탱하게 만든 힘의 근원을 살핀다.

개인에게 직접 듣고 옮기는 구술생애사는 이른바 역사학이란 격자를 통한 학술적 기록이 놓칠 수밖에 없는 저변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대상에 관한 선입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 저자는 1년여에 걸쳐 조순이, 유옥란, 이태경, 곽판이, 김효실, 임혜순 등 60대 말부터 90대까지의 할머니 6명을 인터뷰했다. 애초 목적을 갖고 구술을 받진 않지만, 거기에서 할머니, 아니 ‘우리들의 어머니’의 여성사, 노동사, 지역사, 생활사가 오롯이 나타난다. 할머니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우록리로 시집와 심난한 가난과 노동 속에서 자식을 먹이고 가르치는 보람 하나로 삶을 견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가족이 유지되던 농촌 가정 내 가부장적 환경, 고부 갈등, 남편의 외도, 흔했던 유아 사망으로 인한 고통부터, 혼례·장례·제례 등 각종 의례의 변화, 민간 처방 등 당대의 생활상도 생생하게 되살린다. 누에치기와 명주짜기, 삼베 농사와 베짜기, 목화농사와 무명 천 만들기, 호롱불 아래 바느질 등 이미 없어졌거나 사라져 가는 농촌 여성들의 노동도 모습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할머니들의 인생의 의미를 노동에서 확인한다. 평생 고된 노동으로 몸이 망가졌는데도 할머니들은 좀처럼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한다. 자식을 교육시켜 ‘탈농’하게 한 노동은 할머니들의 자부심이다. 할머니들의 ‘농사 스펙’은 남성을 넘어서고 리더십까지 발휘할 수 있게 했다. ‘할매’들 존재감의 원천인 것이다. 혹자는 구술생애사를 ‘타인의 고통을 전시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폄하기도 한다. 구술생애사에 대해 저자는 “세상의 온갖 정상 이데올로기로 인한 자괴와 낙인을 거둬내고, 그들 안에 기필코 있는 힘과 흥을 끄집어내 한바탕 즐기는 일”이라며 “가난한 사람의 힘과 흥 말고 대체 어디에 희망이라는 게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가난과 노동이 할머니들을 강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쌓인 힘이 할머니들에게 주체성을 가져다줘 ‘할매’를 탄생하게 했다는 것이다. 구술을 통해 드러나는 ‘할매’들은 온갖 억압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이다.

“억울치. 억울코 말고. 다 늙어가 허리가 곯아뿌렀어도, 봄 되마 또 일을 하거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숨구거든. 눈에 흙 들어가야 끝내지 안 그라마 몬 끝낸다 카이. 그기 미련해서도 그렇지만 평생 몸에 밴 그거 따문에 그런 기라. 땅 한 뙈기 노는 거를 아까버가 놔두지를 몬하는 거라. 눈만 뜨마 땅에다가 뭐라도 해야, 자슥들 안 굶기고 쪼매 핵교 가르치고 져우 살아온 사람들이라.”(곽판이 할머니)

‘할매’들은 자신의 인생을 “아주 좋지도 안 하고, 나쁘지도 안 했다”고 담담하게 평가한다. 이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성실하게 삶을 개척해왔다는 자신감으로 읽힌다. 대한민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저자는 구술 기록을 통해, 농촌에서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이 도시를 키웠고, 이들을 키운 사람들은 ‘할매’들임을 새삼 확인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숨은 주역은 ‘할매’들의 강인함이었다. 472쪽, 1만98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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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의 읽는 맛은 사투리에 있다. 저자가 집필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운율이 살아있는 할머니들의 사투리를 글로 옮기는 일이었다. 구술의 느낌을 살리고 말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녹취를 했지만, 저자가 사투리를 잘 모르니 반복해 들어도 작업이 진전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저자는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녹취를 풀어냈다. 저자는 “절반 이상의 녹취를 풀어준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이 책은 2020년도 훨씬 더 지나 출간됐을 것”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