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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기사 및 현장/음악 및 뮤지션 기사

<명작의 공간>로큰롤을 ‘잉태’ 한 그곳에서 ‘20년 사랑’이 무너졌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9. 7. 20.

문화일보는 매주 금요일마다 ‘명작의 공간’이란 코너를 연재한다.

이 코너는 아티스트가 등 명작으로 꼽히는 자신의 작품과 그 작품과 관련한 공간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나는 지금 뉴욕에 계신 한대수 선생님을 떠올렸다.


신문 전면에 걸쳐 아티스트가 직접 글을 써야 하는 코너여서 분량이 부담스러운 터라 조심스럽게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한국에 계실 때 늘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이렇게 쿨하게 써주시겠다고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그것도 육필원고로 말이다.

주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의 앨범인 ‘무한대’에 제일 좋아하는 수록곡인 ‘One Day’를 쓰시겠다고 할 줄이야.


부탁드린 후 며칠 후 선생님의 원고가 도착했다.

원고를 타이핑해 옮기는 일이 즐거웠다.

이 기사엔 한대수 선생님이 직접 쓰신 ‘One Day’와 뉴욕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사는 7월 19일 자 31면 전면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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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의 전 부인이 일했던 미국 뉴욕의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1899년부터 미국 뉴욕 5번가를 지키고 있는 이 백화점은 명품 판매로 명성이 높다.


한대수의 ‘One Day’가 탄생한 뉴욕

1975년 2집 판매금지 당하자 

아내의 응원 속에 뉴욕행 결심 

스튜디오 일하며 음악에 몰두 

아내는 패션계에서 승승장구 

“사랑은 사랑이고 인생은 인생” 

어느날 아내의 이혼 통보 받고 

韓음악 최초 영어 작사곡 탄생


‘원 데이’(One Day)는 1989년 ‘무한대’ 앨범에 실린 곡으로 “여보, 나 떠날래!” “뭐?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로 시작한다.

이 곡은 많은 록 팬이 좋아하고, 나도 자주 들을 정도로 좋아한다. 나는 항상 동료 음악가에게 말한다. 자기 음악을 가장 즐기고 사랑하라고. 자기 자신이 자기 음악을 가장 사랑해야, 팬들도 그 음악을 사랑할 수 있다. 모차르트나 존 레넌같이 약간 오만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 음악에 자신이 없다면, 음반사가 그 음악에 많은 화폐를 투자하고 대중이 그 음악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시간 낭비다! 따라서 음악인은 가치가 있고, 작품성이 있는 음악만 발표해야 한다. 

‘원 데이’는 말 그대로 ‘어느 날’ 나와 20년 동안 동고동락한 아내가 이혼하자고 선언한 날을 표현한 곡이다. 슬픔을 넘어 자살 충동까지 생길 정도로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20살 미술 생도였던 그녀와 서울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만나 회오리바람 같은 열애로 시작한 관계가 어떻게 20년 후에 뉴욕에서 끝난다는 말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서유석과 카페 ‘마음과 마음’에서 밤마다 라이브 연주를 할 때였다. 내가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무대가 끝난 뒤 내게 다가와 “한대수 씨, 제가 파라다이스 와인 한잔 살게요”라고 말했다. 그것이 러브스토리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신장위동(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있던 마을)의 작은 부엌이 달린 방 한 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당시 사회 기준으로 동거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나는 그때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결혼할 때 쓸 비용을 지금 달라고 말했다. 그 돈으로 우리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천장에는 별을 붙이고, 그녀가 모델인 누드 사진으로 벽을 장식했다. 독수리표 스테레오에선 지미 헨드릭스의 찢어지는 퍼즈 톤(FuzzTone) 기타가 ‘퍼플 헤이즈’(Purple Haze)를 불러 외쳤다.

1969년 서울의 파라다이스는 어디인가? 바로 신장위동 우리집이었다. 친구들이 끊임없이 집에 들락날락했다. 화가 정창승은 너무 음악에 도취돼 누워서 떠나지를 않았다. 당시 최고 연극배우인 고 함형진은 자기 남자친구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했다. 김민기와 이정선과 같은 음악가들, 염인택 같은 디자이너, 전국광 같은 조각가, 기자들, 화가 등 많은 예술가가 골방에서 유신 시대에 느낄 수 없는 ‘자유’를 실컷 마셨다.

하지만 모든 시작엔 끝이 온다. 2년 후인 1971년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 중반기라 해외 교포까지 불러들일 때였다. 우리는 얼싸안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내게 “대수 씨, 죽으면 난 어떻게 해?”라고 물었다. 나도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아니, 군대라니? 총 쏘고, 죽이고, 죽음을 당하고, 단체 생활을 하고, 구보하고, 내 싱싱하게 빛나는 긴 머리까지 자르라고? Oh! No! 자살하고 싶어! 안 돼! 여자가 있지 않아! 내 사랑이 있지 않아!


한대수가 미국 뉴욕에서 직접 문화일보로 보내온 육필 원고.
나는 군복보다 세일러복이 더 멋있어 보였고, 탱크보다 구축함이 더 웅장하게 보였다. 이왕 죽을 고생을 할 거라면 해군에 입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군 신병 훈련소 기간은 12주로 육군보다 길었다. 복무 기간도 3개월 더 긴 3년 3개월이었다. 훈련소에서 ‘빠따’를 맞기 시작해 병장이 될 때까지 내 엉덩이와 허벅지는 무지개 색깔이었다. 뉴욕 히피의 메카 ‘이스트 빌리지’에서 사랑과 평화를 외치고, 도어스·레드 제플린·비틀스의 음악에 도취돼 긴 머리를 휘날리며 활보하던 청년 히피가 혹독한 대한민국 해군에서 배고픔에 시달리고, 매일같이 구타를 당하며, 기함 충무함 DD-91 구축함에서 5인치 포 장전수가 되다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여인, 무엇보다 로큰롤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나만의 꿈을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내 팬티에 엉덩이 핏자국이 달라붙어도, 동료 수병이 참지 못하고 구축함 갑판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해도 참았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시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하나님, 어떻게 불공평하고 잔인한 인간의 악행을 목격만 하고 계십니까? 인내와 순종은 시련의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동료입니다. 자유의 대가는 너무나 혹독합니다.”

3년 3개월은 지나갔다. 내가 해군본부 정문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오자 내 사랑이 꽃다발을 들고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수 씨 고생했어. 나도 고생했어”. 그녀는 고통과 비난의 시선 속에서 여자의 가장 보배 같은 시기인 20살에서 23살을 보냈다. 고맙다! 우리는 바로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겸 사진기자로 취직했다. 우리는 직장 근처인 신문로에 셋방을 구했다. 나의 노래 ‘틸 댓 데이’(Till’ That Day)처럼 고통의 가시밭은 끝났다.

1974년 제1회 한국가요제에 내가 작곡하고 가수 현미 씨의 여동생 김명희가 부른 ‘나 혼자’가 10대 작곡가상을 탔다. 이후 나는 신세계음반사와 첫 음반 계약을 맺었다. 김진성 CBS라디오 PD가 노력한 결과였다. 나의 첫 앨범 ‘멀고 먼 길’은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만에 녹음됐다. 권용남(드럼), 조경수(베이스), 임용환(기타), 정성조(플루트·오르간·피아노) 등 연주자들이 참여했다. 수록곡 ‘바람과 나’는 김민기가 내가 군대 간 사이에 불러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고, ‘행복의 나라’도 양희은이 불러 히트했다. 이 앨범의 머릿곡인 ‘물 좀 주소’도 젊은이들의 목마름과 분노를 대변하며 인기를 모았다. 나중에 벌어진 재미있는 일인데 1996년 밴드 블랙홀이 이 곡을 리메이크했을 때 “그 비만 온다면”이란 가사를 ‘커피만 온다면’인 줄 알고 녹음했다. 많이 웃겼지만 훌륭한 록 리메이크였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1975년에 발표한 2집 ‘고무신’이 앨범 커버에 정치적이고 ‘반유신’ 정신이 내포돼 있다는 이유로 판매금지를 당했다. 곧이어 데뷔 앨범 ‘멀고 먼 길’도 방송금지, 공연금지를 당했다. 아니! 피 끓는 24살 청년이 로큰롤을 던지고, 무릎을 꿇고 굴복을 하란 말인가? “안 돼! 대수 씨. 뉴욕으로 돌아가. 거기서 당신의 로큰롤 꿈을 키워야 해!”. 그녀가 내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맞다! 어떻게 젊은 나이에 신문기자로 봉급만 타고 텔레비전만 보고 살아가란 말인가. 나는 음악을 임신한 상태인데. 

뉴욕 또한 만만치 않은 세계였다. 당시 뉴욕은 1950∼1960년대와 비교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월세가 엄청 올랐다. 사진 학교 출신인 나는 상업 스튜디오와 암실에서 하루 8시간씩 사진 인화를 했다. 완전 고액! 그녀는 ‘블루밍데일’ 같은 백화점에서 하루 종일 하이힐을 신은 채 점원으로 일했다. 그녀의 발은 매일 퉁퉁 부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음악에 몰두했다. 나는 서양 세계를 유일하게 정복한 칭기즈칸을 숭배해 로큰롤 왕국을 세우겠다는 마음으로 ‘칭기즈칸’이란 밴드를 결성했다. 당시 최고 밴드는 이글스, 빌리 조엘, 플릿우드 맥, 데이비드 보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이었다. 퀸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클래시, 섹스 피스톨스, 토킹 헤즈, 블론디 등이 펑크 록(Punk Rock)으로 로큰롤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클럽에선 매일 밤 2000여 밴드가 음반 계약을 따내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우리도 도전했다.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수십 개 음반사에 보냈고, CBGB 등 작은 클럽은 물론 유대인 성인식 파티에서도 공연했다. 왜냐하면 음반사 사장과 중역은 모두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워너브러더스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 많은 희망을 걸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 나도 밴드와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녀와 내가 버는 돈으로 밴드를 이끌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2년도 못 버텼다. 구멍 난 독에 물을 부었다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록스타가 되겠다는 꿈은 꿈으로 끝났다.

우리 부부 관계에도 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마치 로봇처럼 사진 스튜디오에서 주급을 받으며 일하는 사이에, 그녀는 패션계에서 열심히 일한 결과 승승장구해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과 ‘자라 인터내셔널’의 중역이 됐다. 나는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애정의 신호탄을 띄우는 여인들에게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 그 결과, 그녀는 나를 떠났다. 그녀도 잘생긴 독일 모델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혼! 

20년 동안 동고동락한 그녀가 갑자기 나를 떠나다니. 내 마음은 회오리바람이 부는 텅 빈 공간이었다. 살갗을 비비며 잠자리를 나눴던 침대도 얼음판이었다. 나는 불면증에 걸렸다. 내 가슴을 찢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녀가 없는 인생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녀는 떠나면서 내게 말했다. “사랑은 사랑이고 인생은 인생이야”. 나는 무너졌다. 그때 ‘원 데이’가 태어났다. 윤태원 프로듀서가 기획하고 손무현(기타), 김영진(베이스), 김민기(드럼) 등 당대 창의적인 로커들과 MBC 코러스가 ‘원 데이’를 협연했다. 1989년 당시 한국의 세션과 녹음 수준을 생각하면 훌륭한 결과물이다. 지금 아내 옥사나도 이 곡을 자주 들으며 뉴욕에 싱글로 발표해보자고 보챈다. 

나는 언젠가 한국의 음악이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영어 가사로 작사해야 한다고 예언했다. 그런 의미에서 ‘원 데이’는 한국 최초의 영어 작사 곡이다. 지금 방탄소년단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라본 곡이다. “Love Dissipates, Pain Endures.”(사랑은 사라져도, 고통은 영원히 남는다.) 

글·사진 = 한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