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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정말로 안녕, 그리고 새 출발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1. 12. 27.

 

내일부터 헤럴드경제로 출근이다. 사실 기쁨이나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충청투데이에서 익숙해진 편안함의 관성으로 벗어나고자 함은 분명히 내 의지였지만, 입사도 하기 전부터 그 편안함이 그리워지니 말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다시 콧물감기가 도졌다. 첫 날, 첫 자리부터 콧물을 훌쩍거리는 지저분한 모습을 보일까봐 몹시 걱정된다. 약을 먹었는데 한 번 더 먹고 자야겠다.

 

 

 

 

무심코 습관처럼 충청투데이 홈페이지에 들어가 내 아이디로 로그인을 했다. 화면에 비친 모습은 내가 그간 보아왔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메일을 비롯한 기자 전용 메뉴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나는 그냥 충청투데이 홈페이지의 ‘일반회원’에 불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자 이메일 페이지를 클릭해봤다. 편집부 기자 명단에도 내 사진과 이름이 빠지고 없었다. 대신 얼마 전 새로 입사한 25기 수습기자 5명의 사진과 이름이 새롭게 채워져 있었다. 모두 편집부에 배속돼 수습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야 비로소 정말 나와 충청투데이의 인연이 다했음을 실감했다.

 

 

 

2011년 12월 26일, 나는 정식으로 서울 시티즌이 됐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나는 서류상 언제나 대전 시민이었다. 헤럴드경제에 제출하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발급받은 주민등록등본은 단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등본 위엔 오직 내 이름 하나만 인쇄돼 있었다.

 

헤럴드경제와 멀지 않은 충정로3가에 원룸을 전세로 얻었다. 전세가는 무려 5천만 원. 이 코딱지만 한 방을 매입도 아니고 고작 전세로 얻는데 5천만 원이나 들다니. 내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아껴 모은 돈과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수상 상금 등 내 재산의 7할 가량이 원룸 전세를 얻는데 쓰였다. 처음엔 가까운 홍제동 쪽에 자그마한 빌라를 구입하려고 했다. 주택담보대출을 2천만 원 정도만 받으면 10평 내외의 빌라를 한 채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원룸을 전세로 얻어 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울로 올라옴과 동시에 빚을 덤으로 어깨 위에 올려놓고 살긴 싫었다. 하지만 서울 집값 너무하다. 5천만 원이면 대전서 자그마한 빌라를 매입할 돈인데 서울서는 고작 코딱지만 한 원룸 그것도 전세라니...

 

방을 얻을 때 복덕방에서 집주인과 신경전을 벌였다. 나는 계약서에 확정일자를 받음과 동시에 주인에게 전세권 등기를 요구했는데 주인은 거절했다. 전세권자가 전세권 등기를 받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따지자 주인은 “등기부가 지저분해지는 게 싫다”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를 들며 “싫으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주인은 확정일자만 받아도 충분히 보호받는데 왜 전세권 등기를 요구하느냐며 되레 내게 따졌다. 맞는 말이긴 하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확정일자만 받아도 내 전세금은 충분히 보호 받는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잘 안다.(이래봬도 법대 전공에 고시공부를 3년 반 정도 한 놈이다) 또한 부동산 관례상 굳이 전세를 얻으면서 전세권 등기를 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리 성격과 말투가 부드럽지 못한 나는 기분이 나빠져 공인중개사와 주인에게 과하게 신경질을 냈다. 중간에 낀 공인중개사 아줌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른 방을 얻을 만 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나는 결국 전세권 등기 없이 확정일자만 받는 것으로 주인과 타협했다. 이틀 정도 시간적 여유가 더 있었다면 당장 자리를 뒤엎고 계약을 파기했을 것이다. 대신 1년만 계약을 했다. 그리고 등기부상 크게 문제되는 부분이 없어 참았다. 남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성질이 유해지는데 나는 오히려 사나워지니 큰일이다. 이는 글에서도 드러난다. 나의 글은 예전보다 유려해진 대신 너무 삭막해졌다. 충청투데이에선 구성원들의 마음이 넓어 나를 참아줬지만 헤럴드경제에선 고쳐야 한다. 나는 복덕방을 빠져나오며 공인중개사 아줌마에게 너무 신경질을 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어른이란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나는 2011년 12월 26일 31살 끄트머리에 와서야 비로소 어른이 됐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어른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진짜 혼자다.

 

내가 확정일자를 받는 동안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께서 방을 깨끗하게 치워놓으셨다. 말끔해진 방은 처음보단 볼만했다. 나는 대전서 내 차에 이삿짐을 실으며 따라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어머니를 말렸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셨다.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덕이다.(여기서 언급되는 어머니는 4년 전 돌아가신 내 친어머니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버지를 두고 차마 서울로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2년 전 가을 대전으로 내려온 것도 아버지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자식들도 다 장성해 떠났고 나 또한 아버지 곁을 떠났으니 이제 두 분만 즐겁게 사시면 된다. 서울역에서 어머니를 전송하며 앞으로 두 분의 인생에 행복만 가득하길 빌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성질 괴팍한 나를 지난 2년간 애정으로 돌봐주신 황천규 편집부장님을 비롯해, 이종원 편집부국장님, 나재필 논설위원님, 우희철 부장님 등께 감사하고 또 바쁜 시즌에 퇴사하게 돼 죄송하다고 전화를 드렸다. 몇몇 선후배들에게도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을 전화로 전했다. 이들 덕분에 격려의 박수를 받으며 충청투데이에서 퇴사할 수 있었다. 모두들 내가 갚아야할 게 많은 사람들이다.

서울 시티즌이 된 첫 날,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간스포츠 편집부에 근무 중인 노진호 선배가 자정 무렵 당직근무를 마치고 내게 전화를 걸었다. 비몽사몽인 나는 다음으로 술자리를 미뤘다.

 

 

12월 27일, 나는 어머니께서 선물로 주신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 먹은 뒤, 양복을 구입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양복을 한 벌 가지고 있긴 하지만 너무 얇아 지금 계절엔 무리다. 나는 차를 몰고 왕십리 이마트로 향했다. 서울역 롯데마트가 집에서 더 가깝긴 하지만 왕십리 이마트가 내게 더 익숙하다. 양복 두 벌을 구입했다. 비싼 것도 아닌데 50만 원이나 들었다. 그밖에 넥타이, 와이셔츠를 추가로 더 구입하니 10만 원이 우습게 넘어간다. 거기에 이런 저런 잡다한 생활용품을 더 구입하니 또 10만 원이 우습게 넘어간다. 만약 내게 박봉을 쪼개 모아놓은 적금과 문학상 상금이 없었다면 서울로 올라올 엄두나 낼 수 있었을까? 주위에 손 벌리거나 대출 없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새삼 돈의 위력을 실감하는 어제와 오늘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사에 제출할 반명함판 증명사진을 찍었다. 6년째 장복 중인 복합우루사도 구입했다. 사진 속의 내 모습은 너무 푸짐했다. 3년 전 2달 동안 강도 높은 다이어트로 13kg을 감량했었는데 다시 특훈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