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중음악 기사 및 현장/음악 및 뮤지션 기사

(인터뷰) 블랙홀: 언제나 옳은 것 지향하는 인류의 미래를 믿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9. 10. 3.

웹진 이명의 필자로 지난 2일 새 정규앨범 [Evolution]을 발표한 밴드 블랙홀의 리더 주상균 형님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10대 때 내 영웅을 인터뷰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하며 실무를 돕는 일이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젠 밴드가 새 앨범을 내주는 일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헤비메탈 밴드가 30년 넘게 활동하며 새 앨범을 발표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아니까.
공무원도 30년 넘게 하기 어려운 세상 아닌가.


-------------------------------------------------------------


블랙홀: 언제나 옳은 것 지향하는 인류의 미래를 믿어

대한민국에서 헤비메탈을 하겠다는 말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헤비메탈은 대한민국에서 밥을 담보해주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직업이어도 30년 이상 종사하기 어려운 이 땅에서, 헤비메탈을 30년 이상 연주하고 꾸준히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고 웃어넘길지도 모르겠다. 밴드 블랙홀은 이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 온 장인이다.

블랙홀은 지난 1989년 데뷔앨범 [Miracle]을 발표해 ‘깊은 밤의 서정곡’으로 헤비메탈 밴드로선 이례적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블랙홀은 [Survive], [Blackhole], [Made in Korea], [City Life Story], [The Way], [Seven Signs], [Hero] 등의 앨범을 통해 이 땅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부조리를 질타해왔다. 블랙홀은 이합집산이 흔한 한국 헤비메탈 계에서 보기 드물게 오랜 세월 공백기 없는 활동을 펼쳐왔다. 주상균(보컬 및 기타), 정병희(베이스), 이원재(기타), 이관욱(드럼) 등 현재 멤버들 또한 20년 이상 무대에서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들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란 말을 적용한다면, 블랙홀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밴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봐도 힘들고 어려운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자는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자에게 등불이 된다. 블랙홀이 지난 2일 [Hero] 이후 14년 만에 새로운 정규 앨범 [Evolution]을 발표하며 등불의 심지를 새로 갈았다. 리더 주상균에게 새 앨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왼쪽부터) 이원재(기타), 주상균(보컬 겸 기타), 정병희(베이스), 이관욱(드럼)

새 앨범 발매 소감을 듣고 싶다. 더불어 [Evolution]이란 앨범 타이틀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
새 앨범을 내놓으니 그 전에 겪은 수많은 어려움, 좌절, 위기의 시간들이 생각난다. [Evolution]이란 앨범 타이틀은 인간이 만든 물질문명의 진화가 인간의 진화를 넘어서 ‘특이점’까지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미래에 인간의 존재와 행태는 어떠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다.

무려 14년 만에 내놓는 정규 앨범이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싱글 및 비정규 앨범 발표가 있었지만 정규 앨범의 의미는 다르지 않은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2005년 [Hero] 발표 후 음악적 성취는 충분했으나 록과 메탈 지지층의 감소, 시장 붕괴를 체감했다. 이 때문에 한계를 극복하고자 많은 고민과 시도를 했다. 2008년부터 여러 싱글을 발표하고 2014년에는 편집앨범 [HOPE]를 발표하며 새로운 음악적 시도와 정체성 확립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2015년부터 9집 제작을 시작해 녹음과 수정, 재녹음, 편집 등의 과정에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 앨범을 완성했다. 그러나 음악 외적으로 기반이 갖춰지지 않아 앨범 발표가 더 늦어졌다.

이번 앨범은 미래를 주제로 담고 있다. 과거엔 역사와 현재의 부조리를 질타하는 음악을 선보여 왔는데, 미래를 음악으로 다루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지금껏 겪어본 세상(좁혀보면 한국사회)을 통해 사람들은 결국 옳은 것을 선택하고 지향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물론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과 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능력을 앞서는 물질문명 역시 옳은 방향으로 모두가 선택하고 가꿔 나갈 것이라 희망한다. 그런 미래의 단면들을 음악으로 그려봤다.

블랙홀 9집 [Evolution] 재킷

이번 앨범을 제작하며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은 무엇인가.
음악에 담긴 내용뿐만 아니라 재킷 디자인 등 외적인 부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사운드 측면에선, 미래사회하면 쉽게 떠오르는 전자음, 샘플링 사운드을 거의 배제했다. 미래에서 음악의 가치는 사람이 직접 연주하는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타 또한 이펙팅 없는 앰프와 기타 자체 소리만으로 녹음을 진행했다.

이번 앨범의 사운드는 마치 일렉트로닉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많다. 어떤 식으로 작업을 진행해 사운드를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
언뜻 들어봤을 때 일렉트로닉을 연상했다면, 우리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첫 트랙 ‘AI’ 외에는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담겨 있지 않다. 그저 기타, 베이스, 드럼, 보컬만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비슷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물론 녹음 방식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기타와 베이스의 경우 진짜 앰프가 아닌 가상악기(vst)를 이용했고, 드럼의 경우 어쿠스틱 사운드와 믹스할 때 우리가 직접 만든 샘플을 사용했다.

앨범 수록 곡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싶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능력과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전망되며, 향후 인간의 영향력과 통제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첫 트랙 ‘AI’는 인공지능이 존재와 진화에서 인간의 역할이 절대적이란 의미를 담은 곡이다.
‘Dimension’은 평행우주, 다중우주에 관한 곡으로 다른 우주의 내가 무엇을 하려 할 때 현재 우주의 나는 무엇을 할지 상상한 곡이다. ‘Item’은 현실과 가상이 공존하는 미래, ‘LOVBOT’은 반려로봇으로 위안을 얻는 사람들을 그린 곡이다.
‘Log In’은 발전하는 네트워크 속에서 불합리와 모순을 극복하고 희망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참여와 실행으로 활발해질 것이란 희망을 노래하고, ‘M. Follow’는 SNS를 통해 기쁨과 위안을 얻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UR FIRED!’는 4차 산업혁명에 위태로워지는 고용과 노동, ‘Rain’은 자연에서 멀어진 미래에 자연 속에서 자유롭고 행복함을 느꼈던 과거를 회상하는 곡이다.
‘UTOPIA’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쌓아질 지고 실현될 때, 진정한 유토피아가 온다는 생각을, ‘HOME’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사람들에게 집과 가족의 의미는 절대적이며 귀가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계속될 것이란 이야기를 담았다.

곡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8집 이후 오랜 시간동안 숱한 고민과 시도를 했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집약, 단순화, 직관적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쉬운 건 더 쉽게, 세밀해야 하는 부분은 극도로 정밀하게 모든 음들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밝지만 더 무겁고 강한하면서도 정밀한 사운드를 만들고자 오랜 시간 작업했다.

과거 앨범과 비교해보면 전반적으로 장조에 분위기도 밝은 편이다. 이 같은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모두가 쾌적하고 안전하면서, 희망차고 생동감 있는 삶을 바란다고 생각한다. 환경오염이나 전쟁, 이기적이고 독점적인 경제구조 등 현재의 많은 문제점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을 것이다. 미래는 인류의 눈물과 고통을 이겨내고 극복할 것이란 믿음 하에 직관적인 모습, 즉 밝은 낮의 일상을 그리려고 했다.

앨범에 발매에 앞서 지난 9월 초 메써드, 램넌츠 오브 폴른, 바세린, 어비스 등 후배 밴드들이 1집 [Miracle] 헌정 앨범 [Re-encounter the Miracle]을 발표하지 않았나.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듣고 싶다.
올해 초에 헌정 앨범에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에게 과연 자격이 있나?”하는 의문이 들었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니 헌정 앨범이 단지 블랙홀이란 밴드가 아니라 대한민국 록과 메탈의 역사에 대한 헌정이란 걸 깨닫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감사를 표했다. 헌정 앨범이 현재 활동 중인 많은 록과 메탈 뮤지션들이 오랜 시간 연주하고 활동하는데 지표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번 앨범에서 놓치지 말아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가.
앨범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노래가 시작되고 몇 초만 흘러도 그 곡의 느낌을 알 수 있고, 분석하지 않아도 많은 게 들릴 것이다. 귀 기울여 듣는다면 악기의 아주 미세한 소리도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모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SNS와 유튜브로 팬들과 소통에 나서지 않았는가. 멤버들과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떤가.
모두들 왜 이제야 SNS와 유튜브를 시작했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사실 절대 안 할 줄 알았다. SNS와 유튜브는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곳에서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체적으로 앨범 프로모션에 나서면서 SNS와 유튜브 또한 밴드의 일이 됐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시스템을 구축했다.

데뷔 앨범 [Miracle]을 발표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무엇인가.
예전에는 몇 주년 하면 생각나는 게 있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이번 앨범 발매가 확정된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발매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렀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더라. 그 순간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밴드를 30년 이상 유지한다는 건 이 땅에서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3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
그 힘은 사람이었다. 초창기 멤버들과 현재 멤버들과 어떠한 조건 없이 서로 의지하며 같이 이 길을 걸어왔다. 작정하고 언제까지 밴드 활동을 하자고 말한 멤버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멤버들 모두 언제까지는 어떻게 활동하자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내일이라도 사정이 생겨 밴드가 해체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한 대화보다는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연습과 연주에 충실하게 산다. 그런 마음으로 살다보니 30년이 흘렀다.

블랙홀 하면 다른 밴드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이 결속력이 강한 팬이다. 팬이란 블랙홀에게 어떤 의미인가.
블랙홀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어머니가 공연장에 오셨다. 나중에 어머니께 여쭤보니 공연에서 밴드가 무슨 곡을 연주했나가 아니라 관객이 좋아하고 만족하는지, 내가 힘들지 않은지를 궁금해 하셨다. 마지막 곡이 끝난 뒤에 겨우 웃으셨다고 하더라. 이런 어머니 모습이 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팬은 늘 보답해야 할 대상이다.

이제 멤버들 나이가 모두 적지 않다. 게다가 체력적으로 힘이 많이 드는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브에서 안정된 연주력을 들려주는 비결은 무엇인가.
30년을 하다보면 기본적인 체력은 연주를 통해 쌓인다. 혹시 건강과 체력이 걱정된다면 말해주고 싶다. 헤비메탈을 하시라고. 배도 안 나온다.

오래전에 농담처럼 한 이야기이지만, 10집까지 내고 밴드 활동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한 게 기억난다. 그 말은 유효한가.
그렇다. 9집도 어떻게 낼 수 있었는지 아찔하다. 정규 8집에서 마칠 수도 있었다. 블랙홀 초기 10집까지만 내고 싶다고 희망했으나 다행히도 9집까지 냈으니 그 희망이 코앞까지 왔다. 10번째 정규 앨범이 나온다면 그 이후엔 정말 계획이 없다. 끝낼 수만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