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경(심영환 옮김, 홍익출판사)
지금까지 시나 시집을 읽고 마음이 움직인 일은 드물다.
예나 지금이나 시를 쓰고 읽고 이해하는 일은 내게는 늘 경이로워 보이는 일이다.
내 수준이 낮고 안목이 부족해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때문에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는 일부러 시집을 많이 붙잡고 읽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시집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시는 나와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포기하며 살고 있다.
그랬던 내게 시경은 마음을 울렸던 유일한 시집이다.
고리타분한 유교 경전이라는 편견은 이 시집에 담긴 시 몇 수만 읽어도 사라진다.
굳이 어려운 한자를 해석하거나 붙잡을 필요가 없다.
한글 해석이 잘 돼 있으니 말이다.
이 시집은 크게 '풍'(風, 주나라 각 제후국의 민요), '아'(雅, 조회나 연향 때 연주하는 노래), '송'(頌, 선현을 기리는 노래)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서 '풍'이 주는 여운이 상당하다('아'와 '송'에선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슬픔을 노래하는 여자,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 형제와 친척을 잃은 외로움을 토로하는 남자, 먼 곳으로 부역을 가게 돼 부모를 걱정하는 아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결혼을 후회하는 여자, 출세한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여자, 만나자고 약속해놓고 노쇼를 한 상대방을 원망하는 연인, 현명한 사람을 멀리하는 군주를 탓하는 백성, 자신을 디스하는 사람을 디스하는 노래, 농사짓는 방법을 설명하는 노래, 잔치의 흥을 더하는 노래, 후배 관리에게 꼰대짓 하는 선배 관리의 모습 등.
'풍'이 묘사하는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삶이 지금과 다를 것 없다는 게 놀랍고, 그 모습을 소박하면서도 솔직하게 묘사하는 시어가 감동적이고 때로는 눈물겹다.
예전에 한글을 처음 배운 할머니들이 쓴 시가 화제가 된 일이 있는데, '풍'에 담긴 정서가 할머니들이 쓴 시에서 느낀 정서와 매우 흡사하다.
이게 바로 시의 원형이로구나.
이런 시라면 얼마든지 마음을 열 준비가 돼 있다.
오랜만에 다시 이 시집을 꺼내 읽었는데도 '풍'이 주는 감흥은 변함없었다.
소설을 쓰는 내게 이 시집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듯하다.
기교로 쓸데없는 장난을 치지 말고,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라고 말이다.
#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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