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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허남훈 장편소설 <우리가 거절을 거절하는 방식>(은행나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7. 26.

 


최근에 읽은 한국 소설 중 현실과 밀착도가 가장 강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유망한 전문직이라는 CFP(국제공인 재무설계사) 응시에 필요한 금융기관 재직 경력을 쌓기 위해 보험사에 입사한 전직 기자다. 
언론계 이야기와 보험업계 이야기가 반복해 교차하며 서사를 쌓아가는데, '방구석소설'에서 보기 어려운 생생한 업계 묘사가 일품이다.

언론계 이야기를 읽을 때는 내게 익숙한 내용이어서 자주 한숨이 새 나왔다.
주인공은 지역지 기자 출신으로 새로 창간한 서울의 한 연예 일간지에 경력 기자로 합류했다.
지역지에서 일하다가 낯선 조직에서 낯선 일을 하니까 기사 발굴은커녕 기본적인 취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무의미한 특종과 속보 경쟁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결국 공황장애를 진단을 받게 되고, 행복해지기 위해(아니 살기 위해) 무작정 퇴사한다. 
나 또한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매일 기사 마감에 시달리면서도, 동시에 신문 구독 부수와 협찬 및 광고비 확장에 압박을 느꼈던 터라 소설에 몰입해 공감할 수 있었다.

보험업계 이야기를 읽을 때는 낯선 내용인데도 마치 실적에 몰린 영업사원에 빙의한 듯 숨이 막혔다.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친 끝에 도달한 곳은 모양만 다른 또 다른 지옥이다.
이 작품이 묘사하는 영업사원의 일상은 날마다 거절의 연속이다.
매일 거절을 당한다고 거절에 익숙해지는 건 아니다.
그사이에 느낀 자괴감과 모멸감은 자신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남의 돈을 버는 게 얼마나 치사하고 힘든 일인지, 현재 청년층이 취업전선에서 얼마나 힘겨운 상황에 내몰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묘사가 날카롭다.

세월이 흐른 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각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적당히 버티며 살아간다.
시원한 사이다 엔딩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다들 밥벌이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사는지는 의문이다.
수많은 '거절'을 견디고 앞날을 '개척'하면 과연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내 나이는 올해 세는 나이로 마흔한 살이 됐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젊은 나이도 아니다.
이제는 만으로도 30대라고 우기지 못하는 나이이니 말이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까 조금은 보이더라.
인생이란 한정된 자원 안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의 연속임을.
지금 걷고 있는 길 외에도 다른 길이 있음을. 
그리고 어떤 길로 가든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음을.
이 작품은 무슨 거창한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가 홀로 외롭게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음을 잠시나마 상기시킬 뿐이다.
소설이 할 수 있는 위로는 딱 그 정도가 좋다. 

책날개로 파악할 수 있는 작가의 나이는 40대 중반이다.
소설 곳곳에서 짬에서 나온 바이브가 넘쳐나는데, 이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전에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소설에서는 어린 천재가 나오지 않는다.
소설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풍성함을 더하는 건 경험임을 이 작품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