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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前 신춘문예 담당 기자 출신 작가가 푸는 신춘문예 썰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11. 18.

 

다시 신춘문예 시즌이 돌아왔다.
수많은 작가 지망생이 원고를 다듬고 있을 텐데, 혹시나 이 잡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끼적인다.
잡설이긴 해도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은 있을 것이다.
현재 작품 활동을 하는 대한민국 작가 가운데 문학 담당 기자로서 중앙지 신춘문예 업무를 직접 경험해 본 작가는 내가 유일할 테니 말이다.
이거 아주 유니크한 경력이다.
작년에 올린 잡설인데 재정리해서 다시 올린다.

1. 괜한 꼼수를 쓰지 말자.
응모 원고는 철저하게 인적사항을 블라인드로 처리해 예심위원들에게 분배된다.
응모 원고를 살펴보면 별의별 꼼수가 눈에 띈다.
인적사항이 앞장뿐만 아니라 맨 뒷장에도 첨부된 경우가 다반사였고, 심지어 장마다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은 응모작도 꽤 있었다.
누가 심사위원이 될 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자신과 인연이 있는 심사위원이면 눈여겨 봐주길 기대하는 꼼수다.

나는 그런 응모작이 보이면 사인펜으로 철저히 이름을 가린 뒤 복사해 사본을 심사위원에게 보냈다.
다른 신문사도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원고에 꼼수를 쓴 응모작치고 수준 높은 작품은 단언컨대 없다.

2. 말도 안 되는 수준을 가진 작품이 당선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된다.
물론 심사위원의 성향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A 언론사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면 당선됐을지도 모를 작품이 B 언론사에 응모해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건 안타깝지만 운의 영역이다. 

하지만 본심에는 어떤 응모작이든 수준 이하인 작품이 오르진 않는다.
대진운이 좋지 않아 탈락했다고 아쉬워할 순 있어도, 내 응모작이 당선작보다 수준이 높은데 왜 탈락하느냐고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 시간에 작품 하나를 더 쓰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심사위원들을 곁에서 지켜봤는데 정말 치열하게 토론하고 싸운다.
단 하나의 응모작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나는 이 정도로 심사위원들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줄은 몰랐다.
실력을 갖춘 사람이 운이 나빠 탈락할 순 있어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 운이 좋아 당선될 가능성은 단언컨대 없다.

3. 심사위원들은 응모작 중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작품을 뽑지 ‘트렌디한’ 작품을 뽑진 않는다.
신춘문예 응모작에는 당대 한국 문학계의 경향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응모자들이 참고하는 작품은 당대에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일 테니 말이다.

현재 한국 문학계에선 페미니즘, 퀴어 서사, SF 등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응모작 상당수가 이를 주제로 다룬 작품이었다.
이는 서로 비슷한 작품이 많았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쓰지 않는 이상, 심사위원 입장에선 신선할 게 없다.
내가 업무를 맡았을 때 당선작 중에도 트렌디한 작품은 없었다.

4. 글자 크기나 폰트는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떤 심사위원도 그걸 신경 쓰는 분은 없었다.
무난하게 눈에 들어오고 읽는 데 지장이 없으면 충분하다.

5. 당선도 좋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후속작이다.
신춘문예 당선자의 생존율이 왜 이렇게 저조한지 예전부터 줄곧 의문이 들었는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며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당선 후 문예지의 청탁을 받아 발표하는 첫 작품이 당선자의 운명을 좌우하더라.
어느 문예지의 청탁을 받았느냐도 당선자의 행보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후속작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면 청탁을 받지 못해 사실상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난다.
당선 전부터 좋은 작품을 많이 준비해놓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