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을 손꼽아 기다렸다.
첫 번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보여준 서정적인 상상의 세계(언젠가 나는 이를 '심장을 가진 SF'라고 표현했다)에 매료된 독자라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독자뿐만이 아니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각 단편이 실렸던 지면을 밝힌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작가가 기성 문단에서도 얼마나 환영받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전작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주제 의식에 통일감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장애를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해 다뤄왔다.
언어 대신 후각으로 소통하고, 기술로 감각을 느끼는 영역을 확장하는 등 작품 속에서 작가는 장애를 결함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방식으로 바라본다.
신체 일부의 장애는 다른 신체의 감각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어 세상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열쇠가 되고, 나아가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같은 시선이 신선하면서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지구 끝의 온실>의 소재였던 환경 오염도 작품 곳곳에서 주제 의식을 환기하는 중요한 요소로 쓰인다.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장애가 대부분 환경오염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묘사한다.
이미 수많은 뉴스를 통해 환경 오염이 부른 장애를 접했지만, 소설로 묘사한 장애는 뉴스보다 훨씬 실감이 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고 역설하는 '오래된 협약'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보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구체적이어서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묘사를 기대했다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전체를 감싸는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에 가깝지 않나?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로라'는 이를 잘 드러내는 작품인데,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등장 인물의 태도가 감동적이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집 또한 결국 SF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나는 작가의 전작이자 첫 장편인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가독성은 좋았지만 이보다 훨씬 분량을 줄여도 되는 이야기를 늘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지나치게 설명이 많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은 뒤 그 생각이 굳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이는데, 그 이야기를 자신만의 호흡으로 정리해 풀어놓기에는 단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p.s. 여담인데 천선란 작가는 단편보다 장편이 좋았다. 또 여담인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SF 서사 중에선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이 정말 압도적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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