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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문학과지성사)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12. 3.

 



나는 이 소설집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칡을 떠올렸다.
첫맛은 쓰지만, 씹을수록 혀 위에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칡.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소설집에는 이런 뜬금없는 감상을 남기는 게 어울려 보인다.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남자친구,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이구아나, 말하는 돌멩이, 화분이 된 아버지, 반투명인간이 된 자신 등...
이 소설집에는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한 설정이 뻔뻔하게 등장하는데, 등장인물 모두 이를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웃기고 허무맹랑한데 묘하게 현실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이 그저 웃픈 이야기 모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문장 곳곳에 깃든 온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은 모두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읽을 때는 황당한 설정에 홀려 무심코 지나칠지 모르지만, 등장 인물을 자세히 뜯어보면 모두 우울증을 피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힘겨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황당한 설정은 독자가 힘겨운 현실을 힘겹게 바라보지 않도록 완충재 역할을 하고 소설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당의정과 비슷한 역할이랄까?
소설집을 읽는 내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난해 등단한 작가가 벌써 단행본을 냈다는 건 그만큼 이 바닥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증거다.
이 소설집이 최근에 읽은 신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좋았다는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가장 개성적인 작품이었다.
다들 대놓고 말을 안 해도 알지 않나?
문학과지성사 스타일의 작품 중에 재미있는 작품이 드물다는 걸 말이다.
문학동네, 창비와 비교해 사세가 많이 약해진 이유도 그 때문이고.
이 소설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소설집답지 않게 재미있어서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