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황모과 작가의 소설 <클락워크 도깨비>를 읽고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쓴 스팀펑크에 관심이 생겼다.
신간을 뒤지다 보니 아작 출판사에서 '조선 스팀펑크 연작선'이라는 기획으로 단행본을 출간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작품은 '조선 스팀펑크 연작선'의 첫 단행본이다.
엄격한 금욕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직접 기생을 관리하는 관(官),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면서도 첩을 들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대부,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복종이 내면화된 여성들.
작품 속 조선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 작품은 기생 명월의 눈으로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섬세한 필체로 짚는다.
증기를 동력으로 활용한다는 설정은 시대적 배경과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장치 역할을 한다.
증기 비행선이 조선의 하늘을 날고, 로봇이 기생 대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풍경을 상상해보는 일이 흥미로웠다.
여기에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존재, 퀴어 서사까지 어우러져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스릴러인 척하는 애절한 러브스토리다.
명월은 만인의 흠모와 멸시를 동시에 받고, 비천한 신분임에도 사대부 못지않은 학문과 기예를 닦은 지식인이다.
사극은 신분제 사회를 전제로 깔기 때문에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갈등을 심화해 보여주기에 좋은 틀이다.
작가는 온갖 모순의 총합인 기생이라는 신분 안에서 아슬아슬한 자유를 누리는 명월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조선 시대와 비교해 얼마나 나아졌는지 묻는다.
작품의 상당 부분이 사회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논의하는 대화로 이뤄져 있는데 그 깊이가 상당하다.
명월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 어떤 소설의 주인공보다도 복잡하고 현대적인 인물이다.
이 작품은 사극이라는 틀을 활용한 현대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아주 스타일리시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신선했다.
p.s. 이 작품의 표지와 장다혜 작가의 장편소설 <탄금>의 표지의 느낌이 비슷해서 "이게 뭐지?" 했는데 같은 디자이너가 작업한 모양이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이 이복동생 때문에 서얼금고법을 만들었다는 언급에선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얼금고법이 만들어진 배경은 수조권과 관련이 있는데 요약하기 길어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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