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모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낯선 언어를 모어처럼 말하게 된다면?
이 작품은 이런 기발한 설정을 바탕에 두고 말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전 세계에 만연한 다양한 혐오를 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인도계 미국인 수키 라임즈가 있다.
그녀는 미국 시애틀의 한 쇼핑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테러 현장에서 파키스탄 이민자 소년을 구하려다 총상을 입은 뒤 사경을 헤맨다.
수십여 일 만에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놀랍게도 모국어인 영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한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이 같은 그녀의 증상은 '수키 증후군'으로 불리게 되고, 전 세계 여러 테러 현장 및 분쟁 지역 생존자에게 무작위로 발생한다.
한국어를 잃어버리고 벨리즈 크리올을 말하고, 중국어를 잃어버리고 조지아어를 말하는 등 새롭게 구사하는 언어가 어떤 언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발현자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신체의 일부가 먼지로 변해 사라진다.
전 세계는 '수키 증후군'을 질병으로 정의하고, 발현 경로를 알지 못해 두려움에 떤다.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으로 입양돼 미국인으로 살다가, 느닷없이 한국어를 말하게 돼 한국에서 관심을 받게 되고, 자신과 상관없는 여러 과정을 거쳐 혐오의 대상이 되고 고립되는 수키의 험난한 여정.
이 작품의 서사는 대부분 다큐멘터리 감독인 화자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수키와 관련한 사람을 만나 진행한 인터뷰와 언론 보도로 진행된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그린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대전Z>와 거의 비슷한 서사 진행인데, 내가 지금까지 읽은 한국소설에선 처음 보는 서사 진행이어서 신선했다.
기발한 설정뿐만 아니라 이 같은 서사 진행도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겠다 싶었다.
이 작품은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바뀌면 인간의 본질도 바뀌는가를 물으면서, 동시에 소수자를 향한 혐오의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지 집요하게 탐구한다.
내겐 전자보다 후자가 더 비중 있게 다가왔다.
'수키 증후군' 발현자(환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땠는지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경험했으니 말이다.
스포일러여서 더 언급하지 않겠지만, 작가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 '수키 증후군' 발현자들이 사실은 사라진 게 아님을 작품의 마지막에서 강하게 암시한다.
작품 중간에 우리 모두 별에서 태어났음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와 연결해 다시 읽으니 큰 그림이 보였다.
고독과 단절이라는 붓질로 그려낸 인간애라는 밑그림 말이다.
좋은 장편소설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성의 없는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걸렸다.
이건 여백의 미라기 보다는 그냥 여백 아닌가.
역대 수림문학상 수상작 중 가장 성의 없는 표지다.
느낌적인 느낌인데 올해나 내년쯤에 수림문학상이 폐지되지 않을까 싶다.
장편소설 공모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인 데다, 당선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화제가 되는 경우도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창비장편소설상도 사라졌고, 문학동네가 주관하던 여러 장편소설상도 문학동네소설상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나.
이 작품은 명색이 큰 상금을 주는 장편소설 공모의 수상작인데도 지나치게 묻힌 감이 있다.
주최 측이 푸시를 제대로 안 하는 게 보이고, 출판사도 대형 문학출판사가 아니어서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형 문학출판사와 출간을 연계했다면 더 뽀대나게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장편소설 공모 수상작 중 최고였다.
이렇게 묻힐 작품은 아니라고 보는데 안타깝다.
리뷰도 거의 보이지 않아서 나라도 읽은 흔적을 남긴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한국소설 신간 읽기를 끊을 생각이다.
당분간 내 작품을 쓰는 데 시간을 쏟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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