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붙잡고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시간은 딥 퍼플의 모든 스튜디오 앨범과 라이브 앨범, 레인보우의 앨범 몇 장, 화이트 스네이크 앨범 몇 장, 토미 볼린 솔로 앨범 등의 러닝 타임을 모두 합친 시간보다 더 길다.
얼추 계산해 보니 일주일가량 걸렸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 읽기였다.
딥 퍼플의 대표곡이나 대표 앨범 정도는 들어봤지만, 나머지는 지금까지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핑크 플로이드에 쏟았던 열정이나 레드 제플린 듣기에 비하면, 딥 퍼플에 관한 내 관심은 거의 무관심이나 다름없었다.
왜 딥 퍼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인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건반 때문이었다.
'레드 제플린보다 하드하고 블랙 사바스보다는 빠른데' 거기에 리드 기타 수준으로 끼어드는 건반 연주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을 때면 그렇게 아름다웠던 건반 연주가 왜 딥 퍼플을 들을 때 왜 그렇게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라이너 노트 삼아 딥 퍼플의 모든 앨범을 다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집필 일정과 무관한 시간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이 책과 더불어 딥 퍼플에 빠져 며칠을 보냈다.
방대한 해외 보도, 인터뷰, 다양한 참고 자료를 활용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앨범을 평가하는 서술이 매력적이었다.
공연장에서 다리가 부러진 프랭크 자파, 재결성 투어 도중 호텔에서 새벽에 난동을 부리다가 덩치가 들어오자 겸손해지는 밴드 멤버 들의 모습 등 다채로운 뒷이야기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마치 딥 퍼플의 투어를 따라다닌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밴드의 음악의 원형을 딥 퍼플을 통해 뒤늦게 접하며 부끄러움도 느꼈고.
아쉬움이 없진 않다.
후반부 서술이 전반부보다 조금 헐겁다.
이를 저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스티브 모스가 리치 블랙모어보다 딥 퍼플에 오랜 기간 적을 뒀어도, 딥 퍼플의 전성기는 리치 블랙모어가 적을 뒀던 기간에 집중돼 있으니 말이다.
21세기의 딥 퍼플보다 20세기의 딥 퍼플에 관해 할 말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딥 퍼플의 최근 행적까지 간략하나마 빠짐없이 다뤘다는 점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딥 퍼플이 21세기에도 꽤 괜찮은 작품을 꾸준히 냈다는 걸 이번 기회에 처음 알았다.
나처럼 딥 퍼플이 21세기에도 부지런히 활동했음을 몰랐던 사람도 부지기수일 테니 이 책은 그런 독자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테다.
이 책의 출간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고 본다.
일부 아이돌의 앨범 외에는 유의미한 양의 피지컬 앨범이 안 팔린 지 오래된 나라, 종이책도 일부 베스트셀러 외에는 1쇄 판매를 못 하는 나라, 록을 듣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 록 뮤직 아티스트의 평전, 그것도 한국인 저자가 직접 쓴 평전을 출간한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니 말이다.
이런 무모한 시도를 멋지게 해 준 저자와 출판사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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