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내가 기자 초년병 시절에 겪은 일이다.
당시 나는 주말판 레저 기사 취재 때문에 한 농촌 마을을 찾았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낯선 광경을 보고 놀랐다.
어린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혼혈이었다.
멀리서 누가 봐도 외모로 구분되는 혼혈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여느 도시의 한국의 아이들처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떠들고 있었다.
농촌에 다문화 가정이 많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 사실이 현실로 다가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이니 한국어로 떠드는 게 당연한데, 그땐 그 모습이 왜 그리도 낯설었는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열의 일고여덟 가정이 다문화 가정이고, 학교에서 놀림이나 차별받는 아이들이 많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아이들은 아마도 지금쯤 성인이 됐을 텐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 작품을 읽으며 오래전에 겪은 일을 생각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농촌 한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20대 여성 '예슬'의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독백을 통해 드러나는 다문화 가정의 실상은 끔찍하다.
피부색이 다른데다 틱 장애에 투렛 증후군까지 앓는 예슬이 경험하는 세상은 지옥도다.
농촌 마을이라는 작은 사회, 그곳에서 다르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멸시와 학대의 이유가 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의미는 다문화 가정에서 이주민 여성이 겪는 고통스러운 삶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현장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다문화 가정 관련 보도와 다큐멘터리보다도 생생하고 처참했다.
문장의 흡인력도 좋아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기가 쉽다.
한바탕 장대한 악몽을 꾼 기분이다.
그 악몽이 내 현실이 아님을 안도하며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국 사회가 '다름'을 얼마나 잔인하게 대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 작품을 한 번 읽어보시라.
대마에 취해 욕설을 쏟아내며 자신을 파괴하는 예슬의 절규가 슬펐다.
소설은 종종 그 어떤 매체보다 훌륭한 고발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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